1. 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
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 / 예수님의 옅은 한숨소리
3. 파송설교, 그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개털모자냐 황금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4. 파송설교, 그 세번째 메시지(마 10:16~23) ;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5. 파송설교, 그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 ; 어떻게 삶이 복음일 수 있는가?
6. 파송설교, 그 다섯번째 메시지(마 10:34~39, 40~42) ; 경고와 상급
파송설교<6> - 다섯번째 메시지 ; 마 10:34~39, 40~42 /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예수님의 파송설교는 끝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그 마무리가 당황스럽다.
뭔가 우리가 착각할수있음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또한 제대로 알아들어 주님의 뜻대로 행했을 경우에 주실 어떤 상급에 대한 말씀이 본문이다. 하지만 그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다. 좀더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상과 벌에 대해 말씀하시면 이해하기가 편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본문 자체가 가지는 또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무리되는 이 본문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파송한 제자들 즉 우리들에게 주시는 착각하지 말것에 대한 경고와 주실 상급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왜 이러한 상과 벌에 대한 약속을 쉽게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게 보이도록 제시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다.
36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정에 영접됨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상황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우리에게 너무 당황스럽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신 복된 가정의 모습을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간절히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배워왔기에 '뭔가 잘못되었어!'라고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물이다.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콩가루 집안이 된다니...
이 가족을 자세히 살펴보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아들과 딸이 있다. 그 아들은 아내를 취하여 집안에 들어와 함께 살아간다. 자연스럽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들과 딸을 자녀로 둔것으로 설정되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흠잡을 것 없는 좋은 가족 구성원을 형성하고 있다. 아주 다복한 가정이라 여겨질만하다. 그리고는 별다른 문제없이 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온가족이 세례받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더욱더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거듭날것이다. 그런데 이 기대가 산산조각난다. 오히려 아들내외가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에 분란이 생겼다.
아버지와 아들, 딸과 엄마 그리고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뭔가 불편한 일이 생겼다. 그래서 불화가 깊어지고 어느 시점에선가는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며 등을 돌렸다. 과연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본문은 구약 소선지서 미가 7장 6절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파송설교의 말미에 미가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심은 그때의 상황과 종말의 시대에 파송받는 제자들 즉 우리들의 정황이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기때문에 미가서에서 이 본문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파송설교의 결론부를 이해하는데 필수 사항이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이 두 선지자는 동시대에 동일한 대상들을 향하여 선지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그 접근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사야는 주로 정치 외교적, 국가적 문제점들에 대한 접근이 많고, 이에 비해서 미가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행위 등의 개인적 문제에 집중하였다. 미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믿음이 개인들의 심령 안에서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와 그로인해 아무런 영적 감흥이 없는 여러 의식들 그리고 죄에 대한 무감각한 현실적 반응들을 주목하며 반응한 선지 사역이었다.
미가서 7장은 이스라엘의 부패로 인한 죄의 결과를 다루며 다시한번 어둠 속에서 소망을 언급하는 말씀이다. 그중에서 인용되고 있는 6절은 이스라엘의 부패로 인해 드러나고 있는 적나라한 죄의 결과 중 한 부분이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실한 영적 열매가 없고 단지 무성한 잎들만 가득한 모습과 같다고 표현한다. '나는 여름 실과를 딴후와 포도를 거둔후 같아서'...
그리고 이어서 '선인이 이 세상에서 끊어졌음'과 '정직한 자가 없는' 현실을 토로한다. 영적 열매가 없기에 아무런 믿음의 영향력도 없는 빈겉데기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4절에서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다'라는 표현이 섬뜩한 현실이다.
이어지는 본문은 이러한 회색빛 상황에 덧붙여진 좀더 잔혹한 현실을 덧붙인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5절).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6절)'
이 상황은 미가 선지자 시절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의 이간질 상황에서부터 비롯된 현실이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이해하자.
이사야 6장에 유다를 일약 강대국의 반열에 올린 유다왕 웃시야의 죽음 기사가 있다(B.C 742년경). 이때 이사야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사야는 다윗가문의 제사장 출신이며 귀족출신이다. 반면에 미가 선지자는 아모스처럼 유다 변방의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때, 유명한 환상을 목격하고 부르심을 받지만 정작 한동안 예언활동을 하지 않는다(웃시야의 아들인 요담이 죽을때까지-약16년/ 왕하15:33). 그러다가 아하스가 유다왕으로 즉위한 직후(B.C 735~715년경)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까지 약 20여년간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었다.
미가는 아사야와 거의 동시대인 히스기야 왕때 주로 예언활동을 벌인 선지자이었다.
이사야는 정치적 식견을 갖춘 귀족출신답게 유다의 정치적 외교적 혼란과 사회적 불의와 타락에 대해 집중해서 예언하였다.
반면에 미가는 소박한 농촌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와 농민 그리고 목자들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며 예언하였다. 아모스와 흡사하게도 개인적인 아픔을 공감하는 사회악에 대해 민감했으며, 종교생활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종교 활동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사야는 정치적인 구도와 외교문제에 대해 왕들과의 담판에 장점이 있었고, 미가는 백성들의 삶의 터전에 가까웠기에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다 어려운 그 시기에 부를 축적하는 비양심적인 상류층과 거짓 예언자들의 폐해 그리고 재판관과 대지주들의 부정을 언급하며 규탄할수있었다.
이처럼 같은 시대의 동일한 문제점이었지만, 그 접근방식과 이해의 폭이 달랐기에, 두 사람의 선지 사역은 서로 합하여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할수있다.
그런데 그 시기는 그렇게 쉬운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나 외교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때였다.
강대국을 만들었던 웃시야 왕과 그 아들 요담이 죽고 난후, 아하스가 유다왕이 되었다. 당시 아하스는 겨우 20세 청년이었다(왕하 16:2).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더불어 유다를 공격하여 아하스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반 이스라엘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공격앞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아하스 왕은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로인해 유다는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파국으로 몰리는 상황을 돌이킬만한 역량도 없었다.
그 결과, 아하스는 유다를 스스로 앗수르 제국의 신하 나라로 격하시켰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만 믿고 바랄것을 권고하지만, 이미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의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 더 매력적이었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 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걸맞는 외교적 역량이라고 생각한것 같다.
앗수르는 아하스왕의 이런 외교적 제안을 수용한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여지없이 파괴하며 다메섹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린다. 그리고는 유다를 앗수르의 신하나라로 공식화하고 매우 많은 조공을 요구한다. 말그대로 앗수르의 작은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앗수르의 신전들이 세워지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몰렉신에게 수많은 자식들을 인신공양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하스 왕 자신이 자신의 아들을 몰렉신에게 제물로 던져 버린다(왕하 16:3). 그리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창고에서 금은을 취하여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그렇게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는 겉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앗수르에게 막대한 조공을 받침으로 겨우 지위를 인정받는 속국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하스를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른다. 우유부단함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아하스왕과 달리 히스기야왕은 이름(여호와가 강하게 하다)만큼이나 의욕적이고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다. 히스기야 왕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앗수르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반란을 위해서 히스기야 왕은 애굽과 블레셋 그리고 모압과 암몬을 이용하려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오히려 이 일로 말미암아 앗수르에 한번 더 항복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때 앗수르 제국은 사르곤 왕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분위기 반전을 제공한다. 히스기야 왕은 사르곤 왕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다시한번 앗수르와의 봉신관계를 파기하며 종교개혁의 고삐를 죄었다. 그리고 사르곤 왕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앗수르 제국에 좀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바벨론과 애굽과의 동맹 관계를 맺고 그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그야말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결과로 앗수르에 대항하는 탄탄한 모양세를 갖춘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사르곤의 후계자인 산헤립이 대열을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을 평정했다.
산헤립 왕은 블레셋과 애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남유다의 남부 지역을 점령한후, B.C 701년경에 예루살렘을 포위해 버리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고립되었다. 산헤립은 그의 역사서에 히스기야 왕과 남유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새장에 갇힌 새'
그 결과는 비참했다.
히스기야는 성전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벗겨내어 다시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속국이 아닌 앗수르 제국의 일개 행정도시로 전락했으며, 그 왕권마저도 대부분 앗수르에 투항한 블레셋의 왕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래서 단지 예루살렘만을 지배할수밖에 없는 서글픈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었으며 혼란스러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상황이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러한 앗수르의 공포스러운 공격과 위협 한 가운데 있었다.
미가의 고향도 앗수르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으로 피난한 상태에서 미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지경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한' 예루살렘의 현실이었다. 정치적 외교적으로도 꼬일대로 꼬인처지이면서, 정작 일상의 삶조차도 정신 차리지 않은채 부패와 폭력 그리고 비양심적인 현실에 묻혀 사는 하나님 자녀들 모습이었다.
이런 다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영적 열매를 맺기는 커녕 곁가지들과 잎사귀들만 무성한 종교적 의무 혹은 행사들만 가득한 현실들...
가장 착하고 선한 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조차도 서로에게 가시같고 울타리 찔레같은 고통을 안겨주는 동족일 뿐이었다...
그나마 유지될것 같았던 가족 혈육의 친밀함이나 신뢰조차도 무너져 버린 형국이었다. 누가 누구의 첩자인지, 누가 누구의 득을 보려고 등뒤에 비수를 꼽을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 혼란이었다. 그것이 가족이라하더라도, 그가 아비든 아니면 딸이든 별상관이 없는 처절한 불신과 공포가 지배하던 혼란스러움이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어진 미가의 한마디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
잠시 질문을 정리하면, 이러한 미가서의 말씀을 왜 파송설교의 결론부에서 인용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좀더 쉽게 착각할수있는 부분을 쉽게 설명해서 딱 집어주시고(족집게 강의처럼), 그에 따른 상급과 형벌을 제시하셨더라면 파송설교가 좀더 멋있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주고 계시는가 하는... 오히려 착각하지 말것을 주문하시면서 던져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당황스럽게하고 뭔말인가 싶게 만들고 있는 느낌이라는것이다. 마무리의 시점에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시는 것과 같은 느낌...
***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의 파송설교의 마무리는 이런 느낌과는 상관없이, 매우 분명하게 우리가 흔히 실수할 수 있는 바에 대한 지적이다.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시고, 가족들간에 심각한 불화가 일어날것이며 그 결과 원수사이가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단언에 사실 많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당황스럽게 하거나 혼란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말씀은 파송설교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무리 경고로 주어지고 있다. 경고는 먼저 그 길을 걸어가보거나 경험한 자만이 알수있거나 경험하는 사실에 대한 주의이다. 즉 소명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삶, 주님의 제자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만날수있는 어떤 과정에 대한 주의사항이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다가 어느날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인격적인 교통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이라고한다면 우선 다행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들에게 믿음의 수많은 선진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서부터 히브리서에서 언급되는바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음이다. 그들의 믿음여정에서 부딪쳤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착각이나 오해 그리고 믿음의 삶이라고 확신하며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발견된 믿음의 판례들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다. 감사한 일이다.
우선 위의 본문을 다시 구분하면, 34~36절까지와 37~39절의 말씀으로 나눌수있다.
34~36절은 먼저 언급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 여정에서 흔히 저지러는 실수, 착각 또는 생각과 확신에 대한 주님의 경고(지성적 측면).
37~39절은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감정적 깊이가 고갈되어 메마른 지적 동의로만 살아가는 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감성적 측면).
- 34~36절 ; 믿음의 확신에서 벗어나기...
예수님께서 마지막 경고의 말씀으로 주시는 첫 단추는 오고오는 많은 세대들이 가장 흔하게 그렇지만 그 결과의 영향력이 매우 심각한 파괴력을 가진 착각과 어떤 확신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출발은 매우 신앙적이며 경건하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종교개혁과 같이 낡고 병든 부분에 대한 발견에서 시작한다. 그저 순응하고 못본척 살면 그만이라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함을 애써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다시금 바로잡으려는 거룩한 열정을 동반한다.
주님께서 인용하고 있는 미가서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젊은 왕 아하스에 의해 남유다의 영적 상황은 피폐해진 정도가 아니라, 근원에서부터 상처를 받고 무너져 내렸다. 정치적 외교적인 계산이 깔린 친 앗수르 정책노선은 당연히 앗수르의 수많은 신들을 불러 들였으며, 아하스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당연한 결과이며 순응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자기 아들을 몰렉신에게 불태워 바치는 인신공양 제사의 실행!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할일이었지만, 상황의 변화와 적응 과정에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리고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 배도와 파탄의 상황 중에 히스기야 왕이 세워졌다.
히스기야는 나름 강력한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앗수르제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애를 쓴다.
선왕의 영적 배신의 현장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회복하여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을 다시금 세우기 위한 힘든 작업을 감행한것이다.
얼마나 선한 열정이며 갸륵한 도전인가! 정말이지 많은 점을 본받고 받아들일 부분들이 많음이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과 반(反)앗수르 정책의 전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뭔가 문제점이 있음을 확인할수있다. 그것은 앗수르 제국과 그 이방종교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한 종교개혁의 몸부림이 또다른 속박과 우상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은 기회를 노리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르곤 왕의 죽음이라는 호기를 놓치지 않을수있었다. 그리고는 좀더 효과적으로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바벨론과 애굽과의 동맹을 맺음으로 반 앗수르 노선의 맹주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시절도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새롭게 일어나 대열을 정비한 앗수르의 새로운 왕 산헤립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튼튼하고 효과적이며 그리고 완벽하다 싶었던 실리적 외교 체제와 방어 태세가 한순간에 박살나 버리는 아찔함을 경험하고 만다. 그 와중에 유다 전체는 예루살렘 도시 국가 형태로 갇혀버리게 되고, 그나마 남은 예루살렘 내에서도 종교개혁의 영향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무질서와 영적 배도 그리고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들 속에서 발견되는 영적 악순환의 어떤 고리가 있다. 처음에는 북 이스라엘에서 좀 더 빈번했고, 남 유다는 그 정도가 처음에는 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북이스라엘을 닮아갔다. 다름아닌 영적인 구조 혹은 안전을 위한 보장과 장치에 대한 세속화라고 표현할수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즉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무엘 선지자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정제도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안전과 체계적인 질서에 대한 자기 확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주셔서 이런저런 견고한 성읍들과 군사적 장치들의 은총을 갖추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된것이다.
전쟁의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자유롭게 역사하심 그리고 우리의 의뢰라는 믿음의 구조가 흔들린 것이다. 그 허물어진 믿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 채우심이라는 단어들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적 변화는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하여 일하시고, 무엇인가를 걸쳐서 완전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뀐것이다.
물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자신이 세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가 흔히 아름답게 고백하는 '당신은 축복의 통로입니다'라는 말은 상당히 고무적이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다. 하지만 이 말에 함정이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큰 차이의 결과를 불러일으킬수도 있음을 이해함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하는 방식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와 같이 정치 사회 외교와 같은 현실에 놓일때 우리는 다소 불안하고 당황스러워한다.
주변의 열강들이 수시로 세력을 달리하고,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치열한 다툼이 일시적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환경인 현실을 살아가노라면, 무언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 채우시는 은총이 좀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예측 가능한 확신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유혹이 누구에게나 생길수있다.
우리의 믿음 여정을 '정처없는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하지만, 정작 대책없는 듯한 현실을 마주하노라면 무언가 어설프고 가당찮아 보인다. 좀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예측가능한 믿음의 길이 오히려 더 믿음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열국의 역사가 그러하다.
체제를 잘 갖추면 좀더 일이 잘 진행되고, 문제가 적어 질것으로 예상했다. 더구나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께서 훨씬 더 역사하시기에 편하고 좋을것이라고 확신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경쟁적으로 외세를 끌여들이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서로를 치기 위해서, 때로는 서로의 연합을 위해서 그리고 생존을 위하여...
특히 북이스라엘은 세습 왕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아주 인기가 있어야지만 왕으로 연명할수있었다. 다윗왕가는 남유다가 전승했지만, 다윗 전통은 북이스라엘이 계승한것이었다. 왕이 있어도 좀더 유능하고 인기있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곧바로 암살당하거나 제거되는 살벌한 현실속에서 그들은 어떻게든 좋은 정치, 능력있는 외교력을 펼침으로 국익에 보탬이되는 결과를 남기기 위해 애써야만 생존이 가능했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왕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정치 외교 사회의 부흥과 안정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최선을 경주할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인내함으로 길이 열리기를 소망했던 다윗의 믿음은 그저 바램일뿐이고, 당장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나고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는 정치수완을 발휘해야만했다. 그 결과 외세를 적절히 끌어들이기 위해 외국 공주와 결혼하고 그들의 종교를 허용해줌으로 실리를 챙겼고, 외교적 마찰과 전쟁이 발발하면 외국과의 조약을 통하여 어떻게든 빨리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노력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정치 외교 국방의 모습은 점차 틀을 갖추고 세련되었다.
이러한 구조에 하나님의 은총이 좀더 풍성히 임하시기만 하면, 안전하고 아름다운 국가로서 양질의 삶을 살수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남유다도 점차 이러한 실리외교와 정치력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남유다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인 대처와 지혜로운 대안이 점차로 유능한 왕, 좋은 지도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히스기야 왕도 종교개혁과 하나님 말씀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적을 다루기위해 또다른 적을 불러들이는 정치력에 더 의지한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기둥의 금칠까지도 벗겨 조공으로 내놓아야 했으며, 안전을 위하여 만든 공교한 외교적 수단들과 장치들이 오히려 뒷통수를 치는 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중 가장 선한 자가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사람이 찔레 울타리보다 더한 기막힌 결과... 가족이라는 최후의 보루마저도 신뢰하지 못하고 등돌려 버리는 형국일찐데 사회는 어떻했겠는가... 나름대로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와 구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잘 채워주시고 역사해주실것을 바랬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미가 선지자는 예리하게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영적 실패의 움직임에 대한 고발은 이미 사사기 말미에 묘사되는 참혹한 영적 실패의 현장에 먼저 소개되고 있다. 재미있게도 사사기에 나오는 그 사람의 이름이 미가 선지자와 같다. 사사기 17장에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미가라 이름하던 사람... 사사기의 2가지 중대한 결말 중 하나인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어떤 일상의 모습이, 장차 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끈 불행의 씨앗이었음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사사기 17장의 간략한 내용은 이러하다.
에브라임 어느 산골에 미가의 어머니가 은 1100개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 레위인의 연봉이 은 10개 정도였음에 비추어볼때, 상당한 거금을 미가의 어머니가 모았음을 알수있다. 어느날 돈을 도둑맞았다. 어머니는 돈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동네동네를 다니면서 그 돈을 훔쳐간 도둑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실것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랬더니 어느날, 아들 미가가 자신이 훔쳤다고 실토하며 어머니께 다시 돌려드렸다. 미가는 신의 저주가 두려웠던 것이다. 어머니는 막상 돈을 훔친 사람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서는 경악한다. 얼른 자신의 저주를 철회한다. 그리고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한다'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한다.
미가가 돌려준 1100개의 은중에서 은 200개로 신상을 하나 만들고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고 아들의 집에 신당(예배당)을 건축한다. 미가와 그 어머니는 그곳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죽복을 위하여 에봇과 드라빔도 만들어두고, 아들 중 한명을 제사장 삼아 예배 드리게 한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도둑질에 대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한 영적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일견 보기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준비가 잘 된것같아 보인다. 신당도 짓고, 신상도 거액을 들여 만들었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제사장까지 세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미가는 뭔가 아쉬웠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돌이켜 복을 받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겼다.
그러던중에 그 마을에 정통 레위인 청년이 찾아왔다. 미가는 정말 기뻐하면서 그 청년 레위 사람을 자기 아들 삼을 정도로 극진하게 대우했고, 두둑한 연봉과 선물등을 내세워 그 집안의 제사장이 될것을 요청했다. 떠돌이 레위 청년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함으로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절에 미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야 여호와께서 내게 복주실줄 아노라..."
얼핏 지나칠수있을 법한 본문이지만, 그 영적 폐해는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멸망으로 이끌수있는 아주 민감한 영적 아킬레스건임을 사사기 저자는 우려한다. 미가가 마지막절에서 언급하는 믿음의 확신- 이제서야 드디어 하나님께서 복주실꺼야...! -은 이제 끈질기게도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흔해지며 더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뿌리 깊은 영적 폐해에 눈뜰것을 원하심이다.
착각하지 마라, 저절로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토록 옷깃을 여밀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이런저런 주님의 명령대로 잘 지켜 행하면 그 결과가 내가 기대한 아주 멋드러진 해피엔딩일것이라는 생각과 기대 그리고 확신에 대해 도전하시며 경고하심이다.
인용된 말씀의 상황 도래는 어느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영적 폐해는 심각하다.
서서히 진행되지만 그 위력은 매우 크다. 나라와 민족 그리고 개인이 멸절하는 어려움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퍼지는 암세포와 같은 영적 환상을 내려놓을 것을 촉구하신다. 제대로된 신학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 그릇 적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일 수 있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파송받은 나그네 여정이며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영적 순례자들이다.
이 길위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었고 성실한 삶이었다면 그것에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이런 믿음의 여정을 흥정의 무기로 삼지 않기로 결단함이 필요하다. 인간에게있어 보상심리가 얼마나 강한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주고받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사회생활이고, 이런 흥정에 있어 무언가 조금이라도 손해봤다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하거나 자기 몫을 챙기려 애쓰는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잘못된 믿음의 확신에서 벗어남으로 자족하며 감사하는 은총의 삶 - 그것이 부르심을 받아 파송받은 제자의 삶인것을...
2. 37~39절 ; 돌같은 내 마음...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감정적 깊이가 고갈되어 메마른 지적 동의로만 살아가는 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감성적 측면).
예수님의 첫번째 경고는 지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면, 두번째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우리의 감성적 측면에서 주어지는 말씀이다.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첫번째 부분이 다소 지적인 측면이 강했기때문에 두번째 경고는 감성적이다라고 표현을 했지만, 주님의 두번째 경고는 감성이 살아있는 실천 정신에 관한것이다.
감성이 녹아있는 실천력이 부족한 모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게으름이다. 머리로써는 훤히 아는데 손발이 움직여주지 않는것... 시쳇말로 귀찮음니즘!
37절은 그야말로 시기심 가득한 속좁은 이의 투정같아 보인다.
예수님은 덜떨어진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런 유치찬란한 말씀을 하심일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마지막 경고의 부분에서 오해받을 만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계시는가 말이다.
본문에서 비교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그리고 예수님이시다. 또한 이러한 비교의 방법에 있어서 얼마나 더 사랑하고 아끼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점에 있어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서 합당한 파송받은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별하신다고 언급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강도 혹은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인 기준만 있을 따름이다. 제자들이 자기 부모님이나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도에 비교해서 더하거나 덜한것을 문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우선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만일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감정 기준선을 절대적으로 정해놓으셨더라면 아마도 '여러번 혹은 매우 잦은 정도로' 주님께 합당치 못한 제자일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내 감정의 적절한 시점인 가족들이 기준으로 해서 '이것 보다 조금더'하심으로 다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말씀과 진리의 기준점이 아주 분명하고 확고하게 그리고 높게 정하시는 주님의 기준점이 여기서는 다소 유동적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예수님은 두번째 경고에서 인격적인 교통의 끈이 살아있는 믿음의 관계가 유지될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실 예수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그저 성화와 같은 그림들과 말씀 안에서 상상만으로 그분을 그려내야 하는 우리들에게있어서 인격적 교통은 사실상 만만치 않은 큰일이다.
눈에 늘 보이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은 미운정 고운정 듬뿍 들며 살아가기에 때론 미워하다가도 돌이켜서는 뗄래야 뗄수없는 가족의 사랑과 유대감을 끈끈하게 드러내지만,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 주님과의 관계와 유대감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주님과의 첫사랑의 감격에 겨워할때는 오직 예수를 고백하며, 주님없이 못살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고백하지만, 그것도 잠시일뿐이다. 시간이 흘러가노라면 그때의 감동은 희미해지고 그저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혹은 타인의 눈살에 겨워 예수님을 고백하며 따라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예수님은 부르시고 사명주셔서 파송한 당신의 제자들과 인격적 교통, 사랑의 소통이 있으시기를 소망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변치않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임을 주님은 잘 알고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30여년 세월과 공생애의 기간 내내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의 교통과 사랑이 변했거나 식었다면, 마지막 십자가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몫에 태인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시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족들끼리도 함께 부딪치며 소통함이 원활치 못하면 남보다 못할경우가 왕왕있다. 멀리있는 친척보다 이웃이 더 나을경우가 있다. 부모 자식간에도 인격적 존중과 신뢰가 깨어지면 상처와 원망 그리고 무관심만이 그 자리를 채울뿐이다. 때론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원망하다가도 이내 대화와 사랑으로 인내하고 양보함으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신뢰와 사랑 그리고 믿음이 충만해져 가는 것이 가족이다. 부모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시간을 쏟을때에만 사랑은 자라가고 커져간다.
주님과의 교통이 이러한 끊임없는 영적 교통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가족들끼리도 서로 멀어지고 무관심해지듯이 예수님과의 관계도 심드렁해지고 그저그런 관성에 의한, 습관같은 믿음 생활뿐일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이점을 우려하신다. 이렇게 흘러가버린다면 정작 중요한 십자가를 발견하고서도 '내가 왜?'하면서 회피해 버릴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를 위해서 간이나 신장도 떼어주겠지만, 무관심하며 미워하며 지낸다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며 외면하는 것과 같음이다. 예수님은 변치않은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셨건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면 '주님 이건 하겠는데, 그건 좀 곤란한데요..."
성도들간의 교통과 헌신 그리고 나눔을 통하여서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영성 개발을 통해서든지 혹은 좋은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거하든지간에,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토록 믿음의 허리를 동여매는것!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그것만이 최후의 십자가를 질수있는 길임을...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38절에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의 전제조건이 바로 37절의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통, 사랑의 고백임을 확인했다.
이러한 감성적 회복은 구약성경에서도 확인됨을 우리를 확인할수있다. 아가서의 존재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야들야들한 감성적 언어와 정서의 회복을 꾀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장치와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감성적 회복과 지속력만을 언급하고 만다면 그야말로 입만 살았고 열정만 가득한 교회의 모습을 만나게 될 뿐일것이다. 그렇찮아도 세상 사람들은 말만 잘하는 시끄러운 집단으로써의 교회 인식이 팽배해 있는 판국에...
예수님은 지적 그리고 감성적 회복과 아울러 주시는 결정적 경고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부분은 감성적 회복의 영역에 해당한다. 감성이라는것, 정서라는 것은 단지 회복만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랑하는 감정이나 정서가 너무 충일하다보면 오히려 타인을 괴롭게하거나 문제가 발생하게끔 되어있다. 조증으로서의 급격한 정서의 변화는 적극적 치료의 대상이다. 무조건 혹은 획일적으로 정서나 감성이 업(up)되는 것은 돌같은 마음보다는 흥미롭지만, 위험하다.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학과 적절한 적용이 그 첫째 경고이듯이, 주님께 대한 인격적 감성적 교통과 아울러 그 영적 감수성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적절한 적용점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바른 적용으로써의 '자기 십자가를 짊'은 예수님의 길로서의 실천을 강조한 표현이다.
헌신과 땀 흘림이 없는 사랑은 사탕발림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한다. 오래참고 견디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랑치 않으며 온유함으로 설때만이 참된 사랑 - 십자가의 사랑임을 말할수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만족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상처입고 고통받는 모든 아픔의 해결책은 그 아픔을 그저 싸매어 주고 낫게 해주는 것으로 그침이 아니라, 충분히 육체적 정서적 만족이 채워질때까지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할때만이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짐을 몸소 보여주심이다.
오경의 다섯가지 제자 제도에서도 여실히 보여지듯이 죄의 해결을 위한 총출동한듯이 제사드리고 몇배씩이나 배상해줄때에만 비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십자가는 이처럼 이땅의 회복을 위한 주님의 방법 그리고 선택이었다. 십자가는 입만 살아있음이 아니고, 모양만 그럴듯하게 멋진 것이 아닌,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헌신과 노력의 땀이 베인 것이다.
우리의 감성적 회복과 유지는 그저 책상머리에 앉아서 멋있는 QT를 통하여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다. 멋진 설교와 열정적 찬양집회를 통하여 회복되며 유지됨이 아니다. 잠시 업(up)될수는 있다. 그러나 잠시일뿐이다. 돌아서면 다시 원점일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십자가의 길을 땀흘리며 걸어갈때에만 온전한 주님과의 감성적 교통이 건강해진다. 누구보다 열심으로 살아가셨던 예수님처럼, 내게 태워진 십자가의 몫을 땀흘리며 고생하며 실천함으로 고양되어진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십자가의 헌신과 땀 그리고 두려움의 극복과 열정으로 자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우리가 먹고 나눌수있는 진정한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골고다 언덕이 진실로 오병이어의 현장이다. 그땐 남자 5000명 정도만이 배불리 먹고 남겼지만, 골고다 십자가 동산은 오고오는 모든 세대가 배불리 먹고 살만한 은혜의 동산이 된 것이다.
내 삶이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한그릇의 진지가 되는 삶이 될때... 진실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누어지는 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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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급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충분한 경고와 더불어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상급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도 가만히 읽어보면 다소 황당한 느낌이 일어난다. 마치 윗부분의 경고를 읽는 듯하다. 뭔가 분명치 않다. 상급을 언급하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상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는듯이 보인다. 상을 주기는 주는데 뭔지 모르는 어떤 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이 뭔지 모르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들은 그래도 상장 제목이라도 있으니 좀 낫다고 할수있다.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은 제목도 없다. 아니 그 자체가 이 상의 제목일런지 모른다.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급'
개털모자든지 황금면류관 혹은 세속적이지만 평수 넓은 천국 아파트나 성능좋은 천국 도로용 자동차 같은 예측 가능한 어떤 상품이나 지위로서의 상급이라면 금세 이해가 될법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주님은 그렇게 분명한 어떤 것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예수님의 아주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약속은 분명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것이다'
이곳에서 분명한 첫번째 사실은 선지자의 수준과 의인의 수준과는 전혀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상을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이다. 기실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은 이땅에서 가히 신기하고도 은총 가득한 칭송과 상급일것이다. 마치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상급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의인들을 향한 칭송과 기림은 대단하다. 그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고마움이 넘쳐날 일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 제자'들을 향하여 선지자와 의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상급이 주어질것을 아주 단호하게 약속하신다. 무엇인지는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상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두번째 분명한 점은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한 조건이 의외로 아주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선지자이 상이나 의인의 상을 타기 위해서는 사실 뭘 해야 할지를 모른다. 또한 뭔가를 하더라도 아주 특별하거나 죽음을 내놓는 일을 벌여야지만 이런 상들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해 뭘 해야 할지가 가장 어렵고 난해 할것 같지 않은가! 사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특히 오늘날처럼, 예수님이 우리 눈앞에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 처지에서는 더 난해하고 어려워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도 잘 처리하지 못하는데, 눈에 뵈지 않는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이거나 아죽 특별한 사람들만의 몫인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섬길 아주 분명한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님이 주시는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해 놓으셨다. 그것이 40절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아주 특별한 영적 도식을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또다른 본문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막 9:37, 눅 9:48)
본문에서는 냉수 한그릇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어떤 가련한 한 인생을 소개하고 있다. 사막에서 한 그릇의 냉수는 한 사람의 생명을 하루정도 더 연명케하는 섬김이다. 이 사람은 그저 무시해도 좋은법한 사람일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영적 도식을 세우신다. 이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 말씀하심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눈길이 공식에 메이지 않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관심이 예수님의 마음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 상처입어 곪을대로 곪아 곧 죽음으로 내몰릴 인생에게 다가서기를 원하시고, 그런 이들을 향하여 민망한 마음을 품고 보다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상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거창한 성전을 건축하고 멋진 엄청난 업적을 쌓아야만 할것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다.
예수님은 어쩌면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주님은 상처입고 나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누구하나 관심 기울이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비타민 한 조각, 몇조각의 천을 이어만든 털모자 한개 그리고 따뜻한 위로와 손길로 믿음 생활하는 것을 원하심일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에 너무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상에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이땅에서 멋져 보이는 칭찬과 사모할 만한 명예나 흡족한 자기 만족이 기다리는 상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은 이땅에서의 상이 아니고, 또한 뭔지도 모르게 감이 잡히지 않기에... 그저 이러저러한 사이에 관심의 끈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뭔가 있어!라고 믿지만, 정작 더 매력적인 상급은 이땅에서 잘먹고 잘살고 명예얻고 인기얻는 선지자와 의인의 상에 더 끌리는...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
주님은 그런 인기있는 추구에서 눈을 돌려 낮은 곳,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장소, 별 소득없는 이들과 더불어 한잔 냉수 기울이며 다독거리는 삶, 예수님의 민망한 마음이 녹아있는 곳으로 우리도 흘러 들어가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의 초대를 다시금 확인하시며, 강조하여 외치신다.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
이제 파송설교의 경고와 상급을 정리하며 글을 맺는다.
경고와 상급을 이렇듯 단박에 이해되지 않게끔 그리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고 계시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할수있을 것 같다.
너만 이런 유혹과 실수에 유독 약한 것이 아니라, 참 길고도 뿌리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연약함임을 알리시기 위함인것 같다. 그저 쉽게 말해버리면, '그래? 좀더 정신차리고 잘 해보자!' 하고 말것같아서, 그리고 잘 해볼려고 하다가 잘 안되고 계속 무너지다가 '어렵네... 난 안되는가보다. 포기하자!'하며 내려 놓을까 싶어서...
그게 아니고, 이런 유혹과 실수의 역사적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며 고질적인지를 먼저 알게 하셔서, 실수해도 실패한다해도 '우왓! 정말로 이것 만만찮네... 왜 앞의 선배들이 실수하고 넘어졌는지 좀 이해가 되는걸...'하며 실수를 되짚어 보고, 정작 놓치고 있었던 부분들을 재발견함으로 최후 승리자로 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녹아 있는 경고와 상급!!!
지성과 감성적 그리고 실천적 측면을 살피고 있는 주님의 경고, 그리고 예수님의 상보다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이 더 매력적인것 같아 헤맬것 같은 소인배 같은 나를 향한 주님의 호소력있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예수님의 상급'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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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이런저런 분주한 일들로 파송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너무 늦게 올린점, 용서와 양해를 구합니다.
하하하... 그러나 어쨌던 부족한 대로 일단락 맺습니다. 좀더 많이 다듬고 싶지만, 그러다보면 또 언제 글을 올릴수있을런지 싶어 일단 저지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