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은 기다리라는 명령 가운데 온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버린 연약함의 보고로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도행전을 믿음의 경전으로 삼고 따라가는 우리에게는 위로가 된다.

흡사 남 잘되면 배 아프고 실수하면 고소해하는 소인배 심보 같지만, 실상이 그렇다.  만약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의 첫 시작부터 거의 완벽한 주님의 12제자들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만 채워지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또 한명의 제자로서 기가 팍 죽었지 싶다.

 

나는 실상 경건과는 거리가 있고, 완벽하고 멋진 믿음의 여정은 타인의 어느 멋진 간증 속의 이야기이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듯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이기에 그렇게 느낄것이다.

그들의 야무지고 멋진 영성을 닮아가야지 하는 굳은 결의보다는 '쟤들이니깐 저렇게 살지...'하는 넋두리와 의지박약의 현실 앞에 고개를 폭 숙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행(?)하게도 사도행전의 시작은 연약함과 실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찔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천연덕스러움이 있어 감사하다.

 

‘예수 충만’은 실제적으로 나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가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가지 않는 이상, 주님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12제자 이후로 모든 예수 제자들의 공통 관심사이며, 주님의 선물이기에 민감해야만 하는 믿음의 아킬레스건이다. 

 

성령 충만이 예수 충만한 12명의 사도와 몇몇 탁월한 어떤 개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도 시대후, 모든 믿는 자들의 관심이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와 추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 믿음의 주제이며 이야기꺼리여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믿는 자들이 너무나 탁월해보이고 때론 특별하기만 한 성령 충만의 설교와 현상들 앞에 너무 기가 죽어버려 관심이 없거나, 때론 중요하긴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믿음의 고수들만의 전유물로 여기거나 혹은 영적인 로망으로써의 성령충만으로 받아들임으로 수련회나 부흥회 또는 기도원 같은 곳에서 6개월 혹은 3개월정도의 약발을 기대하며 은혜의 부스러기를 담는 정도로 여긴다.

 

성령충만을 너무나 많이 듣고 간절히 사모하지만, 어느샌가 이러한 제한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정도의 은혜가 나에게 맞는 성령충만이고, 이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이고 이 이상의 성령충만은 사치라고 여기면서 적당한 성령충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도행전 1장은 새로운 관심을 열어준다.

'어라! 예수충만(예수님과의 3년간의 동거동락)을 경험하고 살아갔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집사들도 나랑 비슷하군! ... 나만큼 실수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구나! ... 나만 그런것이 아니군! ... 이런 사람들이 성령충만의 주역들이라면, 나도 희망이 있겠구나... 성령충만이 그렇게 어렵고 이상한것이 아니라 부족한 내 삶을 풍성케하는 믿음이구나... 기도원이나 교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믿음의 길이구나...'

 

 

1. 기다려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일 동안, 제자들은 당혹감 가운데 부활을 이해하기 바빴을 것이다.  예수님의 많은 증거들 앞에 마음을 추스르며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어쩌면 3년 동안 주목한 것보다 더 열심을 기울여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을 것이다. 이 시간은 그간 주님을 따라 다니며 듣고 접했던 말씀과 이적들 그리고 현실의 이해되지 않았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기회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공생애를 준비하셨던 그 열정으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40일을 채워나가셨을 것이다. 그런후에 마지막 유언처럼 명령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내가 강조하며 가르친것을 명심해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것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같은 기다림의 당부이다. 왜 기다리게 하셨을까?  '몇날이 못되어'라는 단서로 보아 그렇게 길지않은 시간임을 말씀하시지만, 어쨌던  짧지만 분명치 않은 기다림!

 

실상, 성경에서 기다림은 매우 중요한 영성이다.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기다림'은 고비마다 빛을 발한다. 기다리지 못할 만큼 유혹적이고, 조금 더 기다리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어떤 열매를 맺거나 혹은 순종치못함으로 아쉽거나 참담한 결말을 빚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소망이 끊어지고 약속이 희미해지고 닳아 없어진듯한 순간까지 기다려라했었다. 모세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다듬어지기까지 이해되지 않는 긴긴시간을 버티다고 포기할정도로 내버려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다윗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 무심하고 잔인한 세월 속에서 능력을 오히려 키워가야 했었다.

 

제자들도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자신들을 로마의 무력과 동포들의 분노, 진실로 무슨 일이 어떻게 기약없이 닥칠지 모르는 현실 가운데 별다른 대책없이 기다릴것을 명령받았다.  믿음의 선진들이 명령을 받아서 작심하고 기다리던지, 아니면 얼떨결에 기다리던 간에 하염없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정체된 삶을 견디어 내야하는 기다림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다.

 

이 기다림을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기다렸는가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는 가를 주목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은 민족을 시작케하실것에 대한 약속이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회복과 소망에 대한 약속처럼,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요한의 물세례와 비교되는 성령 세례'이다.

 

모든 기다림은 약속이 있어 의미가 있다.

불안하고 당장이라도 도망하여 거처를 옮기고 싶은 보호본능에 맞서서 위험을 고스란히 견디고 불안한 현장 가운데 머무는 것은 그만큼의 가치있는 보상과 의미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

 

이 약속은 비교대상이 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

 

‘요한의 물세례’와 비교되는 예수의 성령 세례!

그러므로 먼저 요한의 물세례의 의미가 헤아려져야 한다. 요한의 물세례가 희미하면 예수님의 성령 세례도 희미해지고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한의 세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영적 형편을 헤아림에서 시작해야 한다.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면모가 큰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실상 더 큰 관심은 오랫동안 선지자의 부재로 말미암아 낙심하며 심음하던 상황 가운데 등장한  하나님의 사람-선지자라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놀러나간 아이가 오랫동안 행방을 모르고 늦도록 들어오지 않으면, 온갖 걱정 가운데 하염없이 마음을 졸이다가 늦게라도 흙투성이라도 멀리 보이기만 하면 그저 얼싸안고 볼을 부비는 것이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인 것처럼, 요한은 학수고대하다 마침내 만난 그 사람이었다.

 

마지막 선지자가 이후,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몇 세대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선지자다운 선지자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저 부모들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들의 실제 삶은 하나님 부재였다.

 

기실 400년 세월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한다.  기껏 100년 세월도 못사는 주제에 곱절의 곱절의 기다림과 아픔을 담아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요한의 세례 운동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선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관심을 끌기에 일단 유리했다.

 

일단은 ‘하나님의 오심, 보내심’의 현실 앞에 감격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듣던 하나님이 드디어 자신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왔는가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우선은 감격하고 울고 볼일이다. 정신없이 매만지고 쳐다보고 뺨을 부비는 것만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음만이 눈에 들어오지, 그가 어디서 어떻게 무얼하며 살았는지 혹은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하는 것은 후에 돌아볼 일이다.

하여 서릿발같은 매서운 음성에도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집중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의 운동은 다소 뜻밖이었다.

요한 자신은 다만 오실이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뿐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오실분의 신발끈도 매듭풀지 못할만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지자로서의 요한의 큰 사역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소 실망이 일어나기도 했을터지만, 이내 더 큰 분에 대한 기대와 메시지에 기대하면서 더더욱 요한의 메시지와 세례운동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함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요한의 사역은 세례운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마디로 요한의 세례 운동은 영적 파격이었다.

단지 요단강에 나아와 하나님의 보내신 이 앞에서 세례만 스스로 행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당시엔 요한이 직접 세례를 시행한 것이 아니라, 요한은 앞에 섰고 나아온 사람이 스스로 침례를 행하는 방식이었다.  보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작은 결단과 움직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요한의 운동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감격했고, 어떤 이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실상 앞서서 어떤 선지자 같은 이들이나 몇몇 거룩한 공동체에서 이미 세례 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거룩했고 간절했다. 세례운동은 율법의 방법이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더이상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절박한 자신들의 한계와 냉철한 현실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남았음을 고백하고 소망하는 표현이 세례운동이었다.

 

실상 세례(침례)는 나의 방법을 포기하는 것. 하나님께만 방법과 살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며 나 자신을 버리는 것, 나를 부정하는 행위, 오직 하나님께 드림으로 다시 살 것을 소망하는 표현방식으로 점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더이상 나의 것, 나의 방식, 나의 목숨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수없음을 고백하는 삶의 정황에서 나오는 영적 몸부림이 세례 운동이었던 것이다.

 

세례 운동은 그들의 거룩한 삶 가운데 맺힌 열매였다.

기다림은 때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치닫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은 하나님 만을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방법 만이 나를 살리고, 하나님의 손길만이 나의 상황을 변화시킴을 뼛속까지 고백하는 열매를 맺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인 온갖 방법들과 별별 시도, 마지막 최후의 수까지 다 동원했지만, 그냥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연약한 상황들을 마주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뭐가 있겠는가!   그저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며 거룩해 지는 것 뿐!  모세처럼 늙고 지치고 머리가 텅비어 백짓장처럼 연약해짐으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해지거나, 다윗처럼 욕먹고도 울컥하는 마음을 배설하지 않고 도리어 묵묵히 참아냄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신 나서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경지까지 다듬어지는 것!

 

뭐 달리 선택할 것이 없는 막막한 현실 가운데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한는 것과 결국 하나님만이 이 현실의 사태를 바꾸어 가실 유일한 대안으로 고백함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세례의 공동체로 버티는 것!  이 두가지외에 기실 별다른 길이 없다.  이러나 저러나 별 다를바 없는 내 삶에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실것을 바라며 점점 더 거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삶!

 

요한의 세례는 이와 같이 비참한 현실, 변할것 같지 않은 세상, 로마의 무력앞에 속수무책인 조국의 암담한 시대 가운데 빚어진 거룩한 영적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쩔수없는 암담한 현실 앞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해서, 죽기살기로 우쨌든동 하나님 만이 우리의 살길이다싶어 거룩한 삶을 작정했고, 그 작정한 믿음의 결단이 더이상 나에게서 우리에게서는 나올수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올수있음을 고백하는 의식 또는 운동으로써의 세례가 전혀 헛다리짚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도 세례 운동에 동참하더라는 것이다. 그저 달리 길이 없어서 죽고 포기하기엔 아쉽고 뭐해서 한가닥 소망으로 기약없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조상의 하나님을 바라고 살자싶은 마음으로 믿음 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셈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 방법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천명하셨다는 사실이다.

 

이점이 놀라웠다.  유대인들도 이미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서는, 거듭나지 않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때가 찼다.  억지로 하나님께서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봤자 별 실속이 없었을터인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달리 설명치 않아도 내 믿음의 삶에서, 내 답답한 현실의 삶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때가 찼고 주님의 오실 준비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바로 이런 점에서 주님의 길을 온전하게 준비하고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