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 <1>


마태복음서에 담긴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 중, 두 번째 설교가 제자들을 이 세상 가운데 보내시며 당부하시는 파송설교이다.

어쩌면 우리 피부에 가장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음성이기도 하다.


광야 나그네 여정에서 살다보면, 문득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가 때론 낯설고 당황스럽다.

보혜사이신 성령의 동행을 약속받은 몸이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입장에서 영이신 성령의 함께하심을 실감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헷갈리는 일상의 삶이기 때문이리라...

하여,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내어버려 두지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절실하며 간절하다.


소명(calling) 받아 살아가지만, 녹녹치 않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명을 지키고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여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늘 어려운 숙제와도 같다.

본문-파송설교는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이렇듯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처방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제자로서의 삶을 어느 때보다 강조하지만, 정작 어떻게 살아야 파송받은 제자의 올바른 삶의 모습인가에 대한 주님의 의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저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하거나 교단의 전통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에 안주한다.  아니면 대충(나름 진지하게) 주님의 이곳저곳에 말씀하신 유명한 몇몇 말씀을 퍼즐 맞추듯 내 입맛대로 각색한 말씀에 기준을 맞춘다.


이러한 믿음의 행동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여 그 기준이 소경의 인도라면 어쩔 것인가하는 노파심이다. 기실 스스로 소경이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름 스스로 신실한 믿음과 말씀 위에 굳게 서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확신하며 살았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부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능력과 말씀대로 의미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았노라 외치며 확신했지만, 그들을 주님은 모른다하셨다(종말설교 중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 산상설교의 좋은 열매 비유가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예외일까?

우리 시대에는 이런 판단의 기준이 변경된 것일까?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의 기준은 임의로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그 기준을 찾고 믿음을 세워가야 한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믿음의 새로운 기준점은 분명하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과 그렇지 못한 땅들(길가, 바위, 가시덤불이 덮인 땅)에 대한 분명한 분별의 기준을 세우심이다.


그런데도 자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때론 피곤해서, 때로는 그저 내키지 않아서...

소명 받아 보내신 파송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노라 하면서도, 정작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대충 알고있는대로 혹은 내 방식대로 믿음의 생활을 이어간다.


믿음의 기준은 오직 주님이신 예수임을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별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irony)이다!

파송받은 삶의 정황 속에서 이리저리 채여 속 골병들어 아파하면서도 그저 겉피부에 새살 돋우는 연고와 일회용 밴드로 떼우는 격이다.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생명의 말씀 처방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바쁘고 힘들고 귀찮고 번거롭다는 서너가지 이유들과 혹은 이런 깊이있는(?) 말씀은 사역자들이나 선교사들에게나 필요할 따름이라는 착각 때문에 점점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현실에서 시작한다.


말은 그럴듯하게 많지만, 정작 실속 없는 우리 자신의 빈약함과 믿음 없음에 대한 반성!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딴짓하기 바빴고 늘 헛다리만 짚었음에 대한 안타까움!

마지막 날, 내 딴에는 열심히 믿음 생활했다고 확신하건만 정작 양이 아닌 염소의 자리로 세워질 수도 있겠다는 그 서늘한 경각심!

짧은 인생, 주님의 부르심(소명) 앞에서 살아가는 나그네 길을 나름 의미 있고 제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추구!


*** 누구를 보낼까? - 파송 받는 제자의 자격, 조건 그리고 자질...


그냥 예수님께서 알뜰살뜰 다니시며 말씀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면 될 것을...왜 굳이 나약하고 문제 많은 나를, 우리를 - 제자들을 파송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천년만년 이 땅에 사시면서 차근차근 사역하시다가 교통편이 발달함과 더불어 이 땅에도 비행기 타고 오셔서 우상을 무너뜨리시고 능력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계시면 얼마나 환상적으로 좋을까!  ^^*  하하하... 답답할 때 한번씩 해보는 생각이다.  그랬더라면 별스럽게 귀찮은 이단들도 자연스럽게 없을 터이고, 복잡하고 힘겨운 신학적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전쟁의 비참함도 없고, 굶어서 죽는 비참함도 없었을 것을... 왜, 나처럼 미련한 제자를 부르시고 파송하셔서 코피 터지게 하는가?


코피든 순교의 피든 간에 헌신과 희생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고백은 사실임을 동의한다.

이 땅에도 그 젊디젊은 선교사가 고생해서 왔다가 한마디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참수당한 목줄기의 그 뜨거운 피가 ,이 땅에 예수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하는 첫 발걸음과 희생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중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허무하고 미련한 일인가 말이다. 지금도 전 세계 각지의 도시든 오지이든 간에 예수님의 파송 받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선교사들 그리고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부르심 받았음을 고백하며 고분 고투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때론 얼마나 미련스럽고 속터지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뭔 큰 영화를 입겠다고 이렇게 살고 있는지...하는 맘이 불현듯 일어난다.


짧은 인생, 뭐 있어? 하면서 신나게 즐길 것 즐기고, 하고싶은것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하며 살고, 뭐 사명이니 봉사니 전도니 하면서 붙들린 시간에 골프치고 운동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 훨씬 더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는 것이 아닐까? 기왕지사 다 죽는 것을... 죽고 나면 꼴랑 한두 평 땅 차지하고 눕든지, 태워져 뿌려지든지 아니면 허름한 항아리에 벌레 꼬이며 너부러지든지 할 것을...


소망이 이 땅에 제한되어 있다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성육신의 신비와 성만찬의 은혜를 고백하는 무리들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다.  도무지 뭔말인가싶지 않는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니... 그것도 희한한 방법 -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임신시키는 방법으로...

발상 자체가 기막히지 않는가! 좀 삐딱한 눈으로 보면 엄연히 성폭행으로 보일법하다. 그러나 마리아의 한마디 -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께서 열서너 살짜리 연약한 여자 아이에게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단적으로 고백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 그것도 약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소녀에게 임재하심!


이 방법은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방법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그저 약혼상태의 소녀가 배가 불러오며 입덧을 하는 모습은 너무나 쉽게 주목을 끌고 알려질 수밖에 없다.

노출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율법에 의한 간음죄로 찍혀서 사람들의 무자비한 돌멩이질로 갈기갈기 찢기며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침투해 오시는 여정이 그리 만만치가 않음이다.  그냥 정상적인 가정에서 나시게 했더라면... 아니면 그의 기이한 능력으로 젊고 건장한 모습으로 한순간에 쨘하고 들어오셨다면 이렇게 채 피어나기도 전에 바람 앞의 등잔불 신세는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왕 희한한 방법으로 오실꺼라면 후자를 선택해서 오실법도 한데, 그렇게 오시지 않으셨다.

희한하지만 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고생스럽지만 그저 묵묵히 삶을 견디는 방법으로 이 땅에 진입해 오신다.


약혼자인 요셉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 맞아 죽을 고비는 넘기지만, 만삭의 몸으로 나그네 여정을 감당해야 했고, 태어나서는 곧바로 생명의 위협 속에 낯선 땅을 떠돌 수밖에 없는 유아기를 보낸다. 아기를 키워본 분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생명이 꺼질 위기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를...


극심한 낮과 밤의 온도차는 어린 아기 예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산후조리도 부실했을터이고 그로인해서 영양가 있는 충분한 모유수유는 힘겨웠을 것이다.

요즘이야 영양분으로 가득찬 분유들이며, 돌아서면 있는 조리원과 부모의 돌봄 그리고 소아과 의원들이 즐비하지만... 하지만 지금도 조금만 눈을 돌려 자연재해의 현장이나 분쟁지역을 볼라치면 제일 극심한 피해와 고통에 희생되는 것은 어린 생명들임을 금새 확인하지 않는가!  깨끗한 물 한 모금이 없어 목말라 고통하거나 더러운 물을 그냥 마심으로 배앓이로 고통가운데 꺼지는 그 목숨들... 몇십원하는 비타민 한쪽, 그 소중한 한 그릇 밥을 못 먹어 너무나 어이없이 죽어간다.


예수의 영유아기가 이런 형편과 별반 다름없는 위기의 남자였다. 그러나 용케 살아남았다. 헤롯의 어린아이 학살도 피했고, 굶주림과 추위와 더위에서도 퇴출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세상 가운데 침투해오시는 여정이 매우 힘겹고 상식적으로 너무나 고비가 많았지만 예수는 지혜롭고 아름답게 자라나셨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용하다. 신통방통하다. 기어코 죽지 않고 한 사람으로 살아남으신 것이다.

운이 좋아서 이 땅에 진입해 들어오신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으심인가? 재수가 좋아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재수가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임마누엘의 은총 가운데 살아남으신 것이다.


우리는 단적으로 고백할수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았더라면, 임마누엘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침투작전은 분명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인간 예수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려주시고 인도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동거 - 임마누엘!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총은 분명히 예수와 함께하는 그 누구에게나 세상 끝날까지 주시는 선물이라 약속하셨다.

임마누엘의 고백은 예수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죽을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는 결코 허무하게 죽지 않는, 아니 죽지 않도록 성령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전혀 새로운 피조물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지만, 이전의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셨다.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는 피조물!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간헐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여러차례 경험한바있지만, 언제든지 항상 임재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파송하시면서 온전한 사람이면서 전혀 새로운 인류를 만드신 것이다. 재창조의 역사!


사람이면서 항상 성령께서 함께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인류가 되는 조건은 단 한가지 뿐이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독특한 새로운 사람-예수를 만나고 그분에게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아 믿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


평생 고기 잡던 베드로가 그날 고기 한 마리도 못잡고 실의에 빠져 그물 깁던 그날, 홀연히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의 난데없는 요청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임마누엘의 은총이리라...

오고오는 수많은 세대의 그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오직 예수 그분만을 위해 살며 헌신하다 때론 피흘리며 죽어가고, 때로는 영광스럽게 때론 억울하게, 때론 허무하게 보일정도의 삶이었다 하더라도 예수 제자의 삶을 포기치 않을 수 있었음은 임마누엘의 은총을 만났고 누렸기 때문일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신 예수와 함께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이렇게 표현할수있다. 누구든지 사람이신 예수를 만나면 성령의 임재가 보너스처럼 제공되는 것이라고...

이는 거의 기계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무슨 성령 세례를 받아야지만 성령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견해이다. 왜 성령 세례니 뭐니 하는가 하면 그것은 성령 임재의 방식-스타일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나온 발상일 따름이다.


즉 성령의 역사와 임재하심이 어리고 약한 마리아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잉태의 신비를 부으셨나를 아무리 연구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으로 오신 예수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항상 임재하시고 도우셨는가를, 우리로서는 가히 그 길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들이다.


그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 드러나야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것은 뒷북치는 말일 따름이다.

그렇지 않다. 분명히 그렇지 아니하다.

성령의 임재와 임마누엘의 역사는 예수를 발견할 때 그 누구나 누리는 우리 하나님의 선물이다. 단지 그 방식 혹은 양상을 잘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파송 받는 제자의 자격은 예수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예수가 사람이면서도 뭔가 남다르다는 것(임마누엘의 독특한 상태)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언젠가 온전히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주권적으로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던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임재하심은 단회적이며 우발적이었다.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의 고백이 그래서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사람 예수의 출발부터 함께하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를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속하지 않은 이상한 새로운 인류로 창조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 모두의 첫 열매가 되시었다. 두 번째 세 번째...억만번째 열매를 맺을 예수의 제자는 이분을 발견하고 성령의 은혜로 독특한 믿음의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이다.


***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입은 새로운 인류


이제 파송설교의 본문으로 들어가자. 마태복음 9:35~10장 끝까지

본문을 5번 이상 정독할 것을 요청한다. 알고 있는 내용 같고, 자주 읽어 식상하기까지 한 본문이더라도 다시 찬찬히 자세히 읽기를 바란다.


1. 마 9:35~10:5a까지 - 첫번째 부분 ; 서론이라고 그냥 소홀히 지나갈 수 없는...


10장 5절 하반절부터 드디어 예수의 설교가 시작된다. 먼저 다루고자 하는 이 본문은 바로 그 이전까지의 서론 부분이다.

어쩌면 주님의 주옥과도 같은 말씀을 들을 준비를 시키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면, 아무리 귀한 내용이라해도 한쪽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러버리고 만다. 사실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를 경우 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소음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예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못하고, 주목해서 집중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그저 꽹과리 소리 정도로만 들려 귀만 아플 것이다.


(정말이지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싶다.  본격적인 내용은 잘 이해되지 않거나 모르겠다 싶으면 기도하고 다시 묵상하며 읽고 공부하면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하지만 들을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만사 도루묵이기 때문에 더더욱 간절한 마음이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본문은 먼저 주님의 탄식으로 시작한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무리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해하는 모습에 주목하신 것이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음 -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목자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후자이다. 목자가 있기는 하지만 양떼를 제대로 돌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병 걸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해두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을까?  왜 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기진맥진해진 것일까?


당시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목자급의 사람들이 왜 주님에게 있어 제대로 긍정적인 인정을 얻지 못한 것인가?

주님의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이렇게 요청하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한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라고...

즉, 예수는 파송할 제자들을 기계적인 어떤 잣대에 맞추어 임의로 부르시지 않으심이다.


주님은 자신의 느끼는 것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찾고 있다.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는 빌립보서 2:5의 바울의 권면과도 같이 제자들이 먼저 품어야 할 것은 거창한 계획이나 야심만만한 어떤 비전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느냐 없느냐하는 점이다.


이 땅에 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 거창한 언변과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낸 허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예수 당시에도 그렇게 많았다. 종말의 때에도 그렇게 많을 것임을 예수는 내다보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품은 이는 분명히 매우 적을 것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점이 매우 두려운 부분이다.


우리의 주님, 예수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에서 걱정스럽게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1~8)...

종말설교 중 양과 염소를 가르는 비유에서, 염소로 구분된 이들의 외침은 분명한 일리가 있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예수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산상설교에서는 나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그들이 외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분명한 어조로 선을 그으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목자, 예수의 제자, 파송 받아 사명자로 살아가노라한다...그중, 한사람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내 딴에는 제대로 선 것 같고 제대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살아가노라싶은데...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더라하면 어쩔것인가싶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 이를 갊이 심하더라하는 처지가 나와는 상관없어(!) 하는 확신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가지지 못하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 건 아닌가싶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날들이 많다.


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의 파송 받은 일꾼으로, 부르심에 민감한 소명자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하는 것을 늘 확인해야만 한다. 진실로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전10:12).


나 자신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마음 지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잠언 4:23). 처음에는 순수한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쉽게 변질되는지는 우리 스스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민망한 마음에 동참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것의 결핍 내지 변질은 곧바로 "목자 없는 양-고생하며 기진하여 불쌍한"이라는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의 수많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또한 이 땅의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이라 외치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등등 우리들의 모습에서 한숨쉬시는 주님의 탄식을 들어야 한다. 정신없이 내가 하는 일에 너무 바쁘고 분주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 탄식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잘못된 길에 서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소음이 너무 심해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큰문, 큰길 -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 위를 걷고 있을 수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마태복음 7:13~14).


나는 분명히 잘 가고 있다싶고 그렇게 확신한다하더라도 가끔씩 주님의 탄식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는 충분히 잘못된 길을 옳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살아 갈 수 있는 인생이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주님의 말씀 중에 정작 중요한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 알겠다.  정작 중요한 강조점은 탄식의 말미에 있는 " ...하라!"에 있다.

주님의 민망해 하시는 안타까운 마음을 읽고 헤아린 사람 그리고 자신의 심령에도 주님의 그 마음을 동일하게 품었을 때, 우리는 추수하는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이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청할 수 있음이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이제 조금 더 분명해졌다. 예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은 단순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그 12명과는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름은 같고 얼굴은 같을지언정, 분명한 변화가 생긴 12명의 제자 명단이다. 그것은 얼결에 부름 받아 임마누엘의 독특한 창조의 손길에 이끌린 12명에서, 이제 주님의 마음과 코드를 맞추어 자원하는 심령으로 일어선 12명으로의 변화이다.  전혀 새로운 재창조의 피조물 - 임마누엘의 은혜를 덧입은 제자들이 서서히 한층 성숙한 자리로 나갈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5:12 말씀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분명하게도 우리의 믿음은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외적인 경건의 모습이나 업적 혹은 연륜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젖에서 단단한 음식물을 섭취하는 선생이 되어가는 길은 오직 의의 말씀을 경험해 가는 것 외에는 달리 제시된 길이 없다.  도를 닦는답시고 거룩한 척 폼 잡고 아무리 있어도 말씀을 경험하고 말씀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발 벗고 수행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권능과 귀신을 쫓아내는 신기한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성숙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함을 확인해야한다.  사실 그러한 은사 중심의 신앙생활을 즐기다보면 그것이 전부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그만큼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그리고 그것도 누구나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봐주는 위치에 있다보면 매우 신앙 생활의 만족도가 크고 계속 그러한 능력 가운데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신앙성숙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매력적이며 집중력이 매우 높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은 이점에 대해 다시 한번 분명한 입장을 데모하듯 밝힌다.

먼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권능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와우~ 놀랍지 않은가! 정말 부러운 일이다.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너무나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은사들이지 않는가!  이중에서 한가지만이라도 있었음 싶을 정도로 귀한 은사들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는 12명의 이름이 언급되어지고 난후, 파송설교가 이어진다.

12명의 이름은 둘씩 찍을 지어 소개된다. 아마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보내심을 예측할 수 있다(막 6:7).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항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명단이 가진 나름의 역할이 하나 더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역할은 가히 도전적이다. 왜 지금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망치로 내리치듯 강하게 내밀고 계심과 같다. 어떻게 보면 지금 제자들은 이대로 당장 나가도 멋진 사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사실 그렇게 충분히 보여진다.


예수님처럼 말 한마디로 그리고 작은 몸짓으로 더러운 귀신이 굴복하여 떠나가고, 일부 잘 고치는 혹은 잘 고쳐지는 혹은 고쳐졌다고 착각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껏 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며 주님의 멋진 제자로 세워지리라 예상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예측은 빗나간다.  이 정도의 권능과 은사를 받으면 만사 오케이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중에 한명이 예수를 팔아먹고 자살해버리는 결과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나약한 배신자 그리고 거사가 성공하면 한자리 해먹을 기대에 부풀었던 뿔뿔이 도망가 버려 정작 예수의 죽음 앞에 그저 여인들과 이방인들만이 의미심장하게 자리를 지키는... 어떻게 보면 다소 한심한 결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본문의 소개되는 표현을 살펴보자.  주목할 점은 첫 번째로 소개되는 베드로와 마지막 소개되는 가롯 유다가 괄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그냥 이름만 소개되는 것에 비해서 이 두 사람은 사족이 붙어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 & 가롯 유다 곧 예수를 판 자'

12명의 이름을 감싸고 있는 괄호의 역할(이런 문학적 기교는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학적 장치)로서의 두 소개글은 긍정과 부정을 담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는 시몬에 대한 소개이고, 부정적인 의미로써의 소개는 유다에 대한 진술이 그것이다.


물론 베드로도 역시나 예수님의 잡히신 뜨락에서 세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으며, 요한복음의 부활기사에서는 애써 주님을 찾아간 기특한 제자의 무리 중에 한사람이었지만 또다시 포기하여 어부의 신분으로 돌아가버렸다가 다시금 예수님의 사명을 새롭게 되새기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어쨌던 그는 보잘것없는 시몬에서 반석처럼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를 위해 사는 사도적 삶임을 우리는 알고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건너서는 안될 강을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건너버림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실패한 제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러한 일이 빚어진 것일까?

왜 베드로는 약함 중에 비실비실했고 모난 부분이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송 받은 제자의 삶, 사도적 삶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반면 가룟 유다는 알려진 바, 탁월한 제자 중 한사람 이었고, 본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놀라운 은사와 권능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를 배반하는 자리, 멸망의 자리에 이른 것 일까?


본문은 바로 그 차이점의 근거로써 곧바로 파송설교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즉, 아무리 많은 권능과 은사가 있다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똑똑하고 배경이 좋다하고 하더라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예수의 뜻이 아닌 그저 내 계획과 기대 그리고 내 방식대로의 실천을 행하며 살았는가하는 점이 바로 이런 치명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도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파송설교의 작은 한부분까지도 예수님의 소망이며 음성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지나가도 될것같은 부분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 이상, 무시하거나 듣지 않는다면 가룟 유다와 같은 치명적 결과를 빚고 말것이라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데모와도 같은 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간 먼저, 정작 주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음과 관심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소명자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신 분이 예수, 나의 주님이심을 자랑스럽게 고백하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그래 널 보내시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무엇이지?  그래 너를 그곳(직장, 학교, 가정, 선교지 ...)에 파송하시면서 조심해야 할 점과 이런저런 경우에 주님의 제자로써 취해야 할 행동지침 같은것이 뭐였지?... 어떻게하면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자로 살아남을수있지?'라는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같음을... 


다시 말해 가룟유다 같은 모습임에  가슴쳐야 한다.


대충 주님 주시는 권능으로 큰소리치고 적당히 귀신들 제어하고 살다가 정작 내 생각 계획대로 밀어붙이다가 실망하기!  그러다가 어찌어찌 다시 가다가 막판에 간발의 차이로 염소로 분류됨! 그리고는 목소리 높여 의아한 표정으로 항의하기! 내가 뭐 어째서 염소란 말입니까!!! 아니 내가 목사였는데, 장로, 제자였는데... 내가 언제 주님을 영접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귀신 쫓아낸다고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 일을 많이 했는데요... 선지자 역할 때문에 직장이나 가정 교회에서 많이 많이 바쁘고, 주의 이름으로 월매나 많은 일을 했는데요...!


우리를 성숙시키며 선생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예수의 파송받은 사람으로 버티며 남게하는 것은 오직 말씀 밖에 없다.  그저 늘 습관처럼 언급하는 '오직 말씀'이 아니라, 예수의 입에서 나와서 나를 격려하며 위로하고 지시하시는 구체적인 "그 말씀"을 의미함이다. 가룟유다처럼 목메어 창자터지는 결말이 아니라, 주님 나라의 귀한 기둥 삼으시는 원동력이 파송설교임을...


한가지 확인하자. 나의 삶의 자리로 보내시며 작은 예수의 삶을 살게하신 그 주님이, 나를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파송설교 중에 한가지라도 기억나는것, 헤아리고 있는 것 또는 감명깊게 가슴 깊이 박힌 못처럼 좌우명이 된 말씀이 있는지...?


만일 없다면 결국 지금까지 나는 가룟유다의 길처럼, 내 방식대로 살아왔단 말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