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성의 앞가림 (금식과 염려함에 관하여...)
* 앞가림 : ①제 앞에 닥친 일을 제힘으로 해냄.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한다. ②자기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가려 나감. ≒앞막이 ¶이럭저럭 앞가림을 하며 사는 사람.
"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요엘 2:12~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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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에...]
사용된 '말씀'의 히브리어 "네움"은 그 어원에 있어서 "하염없는 탄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오인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다소 인과응보적이며 때론 기계적으로 우리에게 벌과 상을 내리시는 엄격한 규율의 하나님으로의 생각과 느낌이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늘 두려울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범죄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은 다소 의외의 모습이지 않는가!
사랑이다...
사도 요한은 이를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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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이제라도 금식하라! 울어라! 애통하라!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아비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토해지듯 간절히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돌아오라는 호소 가운데, 첫번째로 요청되어지는 "금식"에 관한 것이다.
금식은 말그대로 밥먹지 않는것, 굶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일수도 있는 식욕을 억제하라는 것이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어야 살수있는 피조물로 만드셨으면서 정작 먹지 말고 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밥먹고 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음인가? 배부른 상태에서 더 열심히 울고 기도하며 마음을 기울이면 될것을... 왜 굳이 굶고 오라고 요청하는 것일까?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이해의 폭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먼저 이 금식의 규정과 선포가 일반적인가하는 점이다. 즉 일상적으로 이런 요청이 빈번하게 반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금식으로의 요청은 공공연하게 요청되어지거나 꼭 필요한 영적 훈련이라고 하나님은 언급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금식을 하게 되더라도 티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금식으로의 부름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때, 그렇게 추천하고 싶은 영적 수행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실 굶어서 뭐 도가 트인다던가 영적 충만이 채워진다면, 하 얼마나 우리의 믿음 생활이 간편할까! 그리고 별로 어려울것도 없는 나그네 여정일것이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믿음 생활은 기계적인 어떤 수행의 수단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런 방식 자체만으로 획득되지 않음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흔하고 적극적으로 자주 금지하시는 명령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십계명과 같은 절대 금지 명령들을 제외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날들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매번 자주 언급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나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아침에 학교 가는 어린 자녀들에게 잊지 않고 말하는 것이.... "차 조심하고 용감하게 잘 다녀와~ 파이팅"이다.
요즘처럼 사고많고 복잡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어린 딸-은비 은진 시원-이 너무나 안쓰럽고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아빠의 외침이다.
나이 50이 넘어도 부모님 살아계셔서 다녀가노라면 늘 듣는 말이기도 하잖는가!
무슨 의미인가? 걱정과 불안한 마음의 표현이다. 우리가 이 복잡하고 사건사고 가득한 현실을 맨정신으로 '기쁨과 행복 가득 충만'을 늘 경험하며 살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이지 않는가말이다. 약간 현실감이 떨어지는 병을 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된(사랑하는) 이들의 안전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 염려는 일상의 흔한 경험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먹고 살고, 자녀들 공부시키고 양육하는 것이 힘겨운 때에는 더더욱 염려와 걱정, 불안으로 말미암아 뭐라도 해야지 덜 불안해하고 잠시라도 잊고 살아간다. 얼마전 없는 살림이지만 유행처럼 다들하는 펀드를 우리도 하나 해볼까 싶어 은행을 방문했었다. 은행원이 하는 말이 요즘 세상에 펀드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습니까?하면서 이것저것 권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거금(?)을 입금하기로 했다. 물런 몇달 넣지 못해 도저히 형편이 닿지 않아 해지해야 할 현편에 이르렀지만... 그것도 거의 마이너스 10%의 손실을 감내하면서... 에휴~ ^^;;;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싶은 아득함으로 때론 밤잠이 오지 않을때가 있다. 노후 대책이 전무한 형편에 나이들어 어떻게 살까싶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TV를 켜면 흔하게 나오는 광고중에 나이들어 병들어 큰돈 들기전에 이 보험 저 보험 들어봐라, 아이 아빠가 죽어 식당 설거지로 오만상으로 힘겨워하는 아낙의 모습이 허투로 보이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불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앞날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어떤 상황,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경험적으로 현실적으로 볼때 충분히 일어날 법하게 보이는 일들과 상황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 바로 그것이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가장 흔하고 또한 적극적으로 금지하시는 주님의 명령, 음성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는가?
바로 "염려하지 말라-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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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는 것, 걱정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이런 삶의 모습의 특징은 지금 현실에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에 비추어보아 앞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날것을 미리 예상하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미래의 어떤 상황 속에서 인과적으로 충분히 일어날것이라 생각에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능력은 오직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가진 탁월함이다. 생각하고 추측하고 종합해내는 능력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창조적 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자질로 인해 이름도 짓고, 구조를 이루어내며, 문화를 재생산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탁월한 능력을 조심해서 다룰것을 주문하신것이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 대한 제한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제한이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이다.
성경은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다가올 어떤 사건이나 상황들을 두고 보며 방치해두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 삶의 모습이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위해 경계를 하고 예비하는 삶의 가치를 원하신다. 어렵고 힘들것이 예상되지만, 힘써 그 일들을 해결해가는 지혜로움을 칭찬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어떤 종류의 염려를 금지하고 계시는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피조물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적인 부분과 결합되는 것을 금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기 보다, 육체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특히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곧잘 사용하지만, 이 표현은 그저 다른 피조물과의 비교우위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자존감의 표현이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놀라운 영적 승리에 참여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육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고 받아들이며 이해한다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시공간의 제한속에 유한한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육의 존재임을 부정할수없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배설의 욕구속에 화장실로 뛰어가야 하고, 성적인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육의 장막에 갇혀있음이다. 좀더 나아가서는 나와 내 가족이 좀더 안전하기위해 튼튼하고 멋진 차를 소유하고 싶고, 추위와 더위를 막는 것에서 나아가 자기 과시 혹은 인생의 자랑을 위하여 멋진 집이나 권력을 평생의 과제로 바라보고 뛰어다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우리의 육적인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유혹이 우리의 육체적 현실을 영적인 그 무엇으로 바꾸어 보려거나 혹은 육체를 좌지우지하는 영적인 힘을 소유하려는 시도들이다. 다름아닌 영적인 무당 놀음에 대한 간절함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일정한 지배력으로 존재한다.
고대 사회에서도 신의 뜻을 알아내거나 변경하기 위한 수많은 주술과 점술이 유행했으며, 오늘날에도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악한 기운을 피하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들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이사를 하거나 어떤 일을 시작할때에도 방향을 따지며 나쁜 정령을 피하려 애쓰거나 고사를 지냄으로 액땜하려는 그 간절한 염원...
심지어 자동차를 한대 구입하더라도 사고 나지 않기를 바라며 고사를 지내는 그 안타까운 절실함...
조상신의 분노를 그치게 하거나 귀신의 눌림을 빙자한 무당 굿판의 그 안타까운 애절함...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신통하다는 사람들에게 찾아다니며 기도받는 그 신실함...
영적 분별력을 위해 오늘도 성령 충만의 은총을 구하며 나름의 영성 훈련에 여념이 없는 그 기특함...
기실 이 모든 시도들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표면적으로 볼때 참 좋은 시도거나 신실해 보이는 믿음의 태도 같지만, 정작 그것이 영적인 어떤 조작을 위한 일절의 시도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거부하시며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그 어떤 시도를 통해서도 조정되거나 조작되시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그러한 영적 태도를 무척이나 경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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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의 한 태도인 염려와 걱정하는 태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시는 것이다.
염려가 당신의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탁월한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단 하루치의 염려만 허락하셨다(마태복음 6:34).
염려하지 말것을 요구하시면서 동시에 하루치의 염려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예 염려치 말라는 것과 하루치의 염려를 인정하시는 것에는 차이가 분명이 있다.
만일 아예 염려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영적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심 일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 창조의 영성 - 염려하고 걱정함으로 앞날을 창조적으로 준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금지하시지 않고 있음이다.
또한 내 삶의 일부를 조작해 내고 싶은 즉, 영적인 의미가 결합되어버린 염려에 있어서도 아예 시도 자체를 금지했다면, 우리는 믿음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것이다. 그저 기계적이고도 맹목적인 광신도의 모습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루치의 염려를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 내고 계신다.
즉 내일을 맞으면서 또 하루치의 염려와 걱정만으로 남은 세월이 채워지는 모습을 예상하면서 우리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또한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해보자.
정상적이다 비정상적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무엇이 정상적인 삶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적인 모습일까?
우리네 인생의 정상적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믿음 생활이 항상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지며 만사가 술술 잘 풀려나가며 가정(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고부간...)이나 사회(동료, 선후배, 상사...)의 인간관계가 원만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합되어 별문제가 없는... 이러한 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그냥 상상의 나래를 펼칠때 꿈꿀수있는 일이지 않는가?
실은 우리네 삶의 여정에 이런 아름다운 상황이 지속적이고도 빈번하게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비정상적이다!
이런 일들은 바램이고 소망일뿐이지, 나이를 먹어가며 경험하는 우리의 생활과 주변 여건들 그리고 인간 관계의 현실은 가히 비극적이고도 괴롭다.
매일 끔찍한 강력 사건이 뉴스를 장식하고, 내 주변의 인간관계가 돈이나 이해관계 혹은 거짓과 이기심으로 멍들어 가고 있음에도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하루 하루가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이 내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
사실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때론 참고 살거나 무시하거나 판을 깨거나하면서 살아간다. 때때로 죽지 못해 살 경우도 왕왕있다.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경구때문에 혹은 용기가 없어서 그냥 주저앉아 그냥 살기로 작정할때도 많이 있다.
피조물의 세계는 다 이모양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진행과정이다.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열역학 법칙, 현상론이라고도 하는 물리학의 법칙이 있다. 뭐 1법칙 2법칙(엔트로피 법칙-즉 무질서의 법칙) 3법칙 하면서 어려운 말들이 있는데, 우리가 발견한 그 법칙들의 중요한 점 하나가 균형과 제한이라는 점이다. 일과 에너지의 관계, 분자간의 관계 ... 뭐 이런것이 질서있게 바뀌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제한이나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규칙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피조 세계가 절대로 변질되지 않고 질서대로만 움직인다면 제1법칙만 발견될 뿐일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물질 세계, 현상의 세계에서도 뭔가 일이 꼬이고 발견된 첫번째 법칙대로만 움직여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염려를 불러일으킨다.
염려와 걱정은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당연한 피조물의 신음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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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의 너무나 적나라한 정상적인 모습 앞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한다고 네 영적 상황을 조금도 변경하거나 바꿀수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계신다(마태복음 6:27).
내 삶의 정상적인 모습에 낙심하며, 어떤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싶어 몸서리쳐질때, 우리는 창조주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마냥 지금의 상황을 부정하며 회피하여 도망 간다면, 내 영혼의 회복의 중요한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 버리는 것이다.
현재의 처지, 낙심스럽지만 진정으로 내 앞날을 걱정하고 내 삶의 의미를 부여 잡고 싶은 염려는 소중한 주님 앞으로의 초대이다. 거룩하신 창조주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진실하고 절실한 하루치의 염려를 회피하지 말고 품고 살아가자. 오만상 걱정하고(그렇다고 너무 티 내지 말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하는 절박함으로 하루의 염려를 채워나가자.
두가지 선택을 할수있다. 결과는 매우 명백히 다를 것이다.
첫째는 이 염려 끝에 "내가 무엇인가를 결단하고 조치를 취해야 해!"라고 용감하고 멋있게 벌떡 일어서는 것이고, 둘째는 염려하며 걱정하는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전자의 모습은 갸륵해 보이고 기특해 보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길이 없다. 분명히 그 길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영적 조작의 길이기 때문이다. 간절하고 절실하지만 번지수를 잘 못 짚는 것이다. 멋있어 보이고 씩씩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용감하고 진취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의존적이며 팔자를 고치려고 헛다리를 짚는 고단한 세월을 보낼것이다.
후자는 일견 나약해보이지만 희망의 끈을 제대로 잡고 영안이 제대로 열리는 것이다. 피조물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은 잡다한 귀신을 보는 영안이 열릴 필요는 없다. 만일 육신의 눈을 뜨고 있는데 귀신들이 헛것으로 막 보인다면 얼마나 고루한 삶이 되겠는가! 무섭고(몇번 보다보면 덤덤해지겠지만) 불편해서 제대로 살수 없게 될것이다. 육신의 피조물이 영적인 눈을 뜨도 되고, 열어야만 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어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치의 염려와 고통 가운데서 바라 봐야하고 시도해야 할 우리들의 몸부림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며, 그분과 나는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임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어지러져 버린 내 인생을 진정 아름답게 디자인하실수있는 창조주와의 만남
그러므로 밥 굶어라는 금식으로의 초대는 정상적인 내 생활이 정상적인 이 세상의 공급만으로는 조금도 변화 될수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 현장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내 몸을 괴롭게 함으로 - 고행 수행함으로 종교적 경건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소망하는 내 영의 몸부림이 되는 것이다.
염려하고 걱정 근심함으로 내 앞길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낫게 변화시키려는 주인의 자리를 진정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포기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영양 섭취를 끊음으로 자기 스스로 자살하기 위한 극단적 악씀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 나를 사랑하사 자녀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내 삶을 의미있게 합니다하는 고백인 것이다. 굶는다고 죽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다. 태양없이도 살수있는가? 그렇다. 태양 때문에 살고, 한끼 영양가 있는 식사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있을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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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좀 길어져 버렸다. 짧게 표현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할 내공이 아직 없음 때문이다. ^^*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금식으로의 초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는 자들의 영적 고백이며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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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금식하라! 이제라도 울어라! 이제라도 애통하라! 이제라도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작사/박용주, 작곡/설경욱)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
말씀하시는 주님!
이 교회와 심령에 늘 새로운 영적 충만을 부으사
주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 생의 기쁨과 소망되게 하소서.
저와 교우들 모두가 이제라도 금식함으로 주님앞에 달려가도록 눈을 열어주세요.
아멘.
참 오랜만에 들어와 흔적 남겨보네요. ^^;
목사님 칼럼,
많은 생각하게 합니다. ...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다."
다소 길더라도(^^ 전혀 그런 생각 안들었어요)
이런 저런 핑계로 나태해져있는 저에게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하는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직장 일로 좀 화도 나고 힘도 들었거던요.
아무리 그래도 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끄적이다 보니 댓글이 자꾸 길어질 것 같네요. 이만 줄여야 댓글이겠지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