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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text">목사님 컬럼</title>
      <updated>2012-02-06T09:04:00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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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사장이 믿기 시작하다!  - 사도행전 6: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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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5-19T11:57:57P</published>
      <updated>2011-05-19T17:52:49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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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6:7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믿기 시작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7절에서 드러나는 부흥의 결과는 그 자체도 의미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즉, 이전 부흥의 결과는 주로 12사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7절의 부흥은 일곱일꾼과 더불어 사역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있어 주목된다. 더욱이 누가는 이 경우에 있어 특이한 사항으로 ‘많은 제사장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허다한 제사장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왜 중요할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 시점에서 제사장들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사도행전 전체에 있어 어떤 전환을 가져오는 것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스데반 집사(일반적으로 집사라는 호칭이 통용되기에, 스데반 일꾼 대신에 스데반 집사라고 호칭할까합니다)의 체포, 설교 그리고 죽음을 다루는 본문을 시작하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제사장들이 믿기 시작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당시에 제사장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오늘날 목회자가 넘쳐나서 고민하는 것처럼, 상당히 많았다. 물론 당시, 제사장의 역할이 희생제사 집전과 축복의 선포, 성전 음악을 관장함으로 기악과 성악의 연습과 공연, 성전의 질서 유지, 절기의 나팔 불기과 행사 주관, 성전마당과 건물에 대한 유지 보수, 예배자의 형편을 파악하여 적절한 희생제물 정해주는 상담, 성전 금고 운영, 질병조사와 정결의식 수행 그리고 시신이나 신체적 유출과 접촉으로 생긴 문제들에 대한 평가(예수복음서사전 참조)등으로 광범위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래서 어느 정도의 제사장 숫자를 유지하는 것은 필요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예에서 보다시피 그 당시의 제사장 무리가 필요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제일 중요한 사역이랄 수 있는 성전 제사의 참여는 일생에 몇 번 혹은 아주 오랜 주기로 참여할 수 있었다. 사가랴는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이었는데 당시 제사장의 수가 너무 많아 그룹별로 나누어 성전봉사를 담당했으며, 그 기간에도 성전의 여러 일들을 제비뽑아 나누었고 그 중에서 성전에 들어가 향을 사르는 일을 맡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었고 평생 단 한번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업무이었다. 사가랴가 바로 이렇게 돌아오기 힘든 업무를 수행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고 하지만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잠시동안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처럼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 곳곳에서 감초처럼 존재하며 백성들의 삶을 조정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사두개인으로 부유한 제사장들과 정치적 권력과 경제권까지 장악한 제사장 그룹도 있었지만, 대개는 가난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며 동족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렇듯 유대 사회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제사장들이 예수의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12사도의 사역이 유대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 베드로와 사도들은 더욱더 기도와 말씀을 연구하는 사역에 전념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양질의 설교와 가르침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더 깊이 있는 말씀의 해석과 도전은 유대교의 전통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들마저도 바꾸어놓는 놀라운 사역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사장들은 40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방언을 하고 그림자만 밟아도 기적이 일어나는 일들로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힘든 부류라고 할수있다. 그런 신기한 일들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소로운 마술이나 속임 혹은 실제라 하더라도 별로 가슴에 닿지 않는 야단법석일 뿐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tartFragment--&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제사장은&amp;nbsp;하나님을 제일 가까이에서 섬기고 제의를 담당하는 실무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뜻밖에 있어 낯선 경험일 수 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정직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들을 담당하며 순종하는 제사장이었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당황하며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다.&amp;nbsp; 어쩌면 너무나 틀에 박힌 정형화된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이며 틀에 정형화된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사장들이 깨어질 수 있는 것은 진실로 깊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 마른땅을 호수되게 하시며 차돌을 변하여 샘물되게 하심을 노래한 시인의 고백처럼, 도무지 미치지 못할 영역의 사람 - 드디어 제사장이 예수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백은 마치 오래동안 부모님의 신앙 영접을 위해 애쓰고 기도하다가 마지막 병석에서나마 극적으로 예수를 영접했을때의 그 감격과 기쁨의 울림과 흡사하다. &lt;/span&gt;&lt;/p&gt;&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를 기점으로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일신된다. 즉 유대사회로의 진입과 영향력은 어느정도 무르익고 있다는 신호탄으로써 ‘제사장들도 믿게 되었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 그리고 사울(바울)의 등장과 사역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대상을 향한 복음의 진전을 기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고보면, 7명의 집사가 모두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된 것이나, 스데반의 순교와 그 자리에 있었던 사울의 등장 그리고 베드로의 선교여행 등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사역과 선교 그리고 바울 사도의 등장과 선교가 순항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앞으로 전개되는 사도행전의 에피소드는 이제 분명한 전환점을 가진다. 성령행전의 역사가 사도들에 집중되고, 유대사회에 한정된 사역이라고 본다면, 이제 그 무대가 훨씬 넓어지고 다양해지며 복잡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표면적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의 독무대처럼 보이지만, 초대교회와의 연합과 교통이 전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성령 충만의 양상도 이전과 같이 더욱더 흥미진진하게 드러날 것이다. 기실 어찌보면, 너무 걸출한 사도 바울의 사역 때문에 정작 바울과 동행한 성령의 충만하심이 많이 가리워진 본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사도 바울이 탁월하고 베드로가 우월해서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님을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어느샌가 사람 바울에게 매료되고 박수를 보내곤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울을 바울 삼으신 이는 주님이시다. 바울을 사용하시고 놀라운 열매를 맺어가심은 성령의 열매 일 따름이다. 바울과 우리는 그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 일 뿐임을 다시금 찬찬히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만이 드러나셔야지 바울이 드러나고 위험한 우리가 드러난다면 금새 교만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다시금 내 삶의 여정이 성령행전 이기를 소망하며...&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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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도록(일곱 일꾼을 세우다)   사도행전 6: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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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4-27T15:09:49P</published>
      <updated>2011-04-28T20:19:44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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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6:1~7 /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도록(일곱 일꾼을 세우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절의 상황은 대개 두가지의 해석이 공존한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석해도 기실 무리가 없다. 왜냐면 그 양상을 인정하고 조치를 취하는 사도들과 공동체 지체들의 반응이 본문의 주된 관심이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기독교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과부들이 받았던 사회적 지원이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 문화에 익숙한 히브리파 과부들에 비해서 헬라 계통의 과부들이 교회의 동등한 재정적 지원을 공급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원망이 터져나왔다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또다른 해석은 이와 다르게 헬라파 유대 과부와 히브리 유대 과부들이 교회 공동체의 섬김과 봉사의 기회에 있어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아무래도 언어에도 서툴고 히브리 문화에도 익숙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봉사하는데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에나 일에 능한 히브리 과부들만이 교회 봉사를 독점하다시피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것에 대해 불만과 원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첫 해석은 다같이 형편이 어려운데 재정적 지원을 받음에 있어 사회적 인종적 차별이 있어 불만이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 해석은 급속하게 성장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할 일이 많아졌고 일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과부 유대인들의 손길이 요청되었는데, 그 과정에 있어 호흡이 맞는 이들끼리만의 편나누기식 봉사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배경이나 말이 잘 통하는 이들(히브리파 과부)끼리만 너무 많은 봉사를 독차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어 달라는 요청으로써의 원망이라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하지만, 첫 번째 관점도 나름 상당한 일리가 있기 때문에 뭐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 지적 한 것처럼, 문제의 양상이 어떤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본문은 이러한 원인 때문에 생겨난 불만과 원망에 대해 사도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풀어나가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절의 상황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또 다른 위기를 알려준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원인이 있는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파 사람들의 원망과 갈등이 그것이고, 또한 ‘제자가 더 많아졌다’라는 본문의 시작이 들려주는 어려움이다. 교회 공동체의 문제나 위기가 외부의 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더 풀기 힘들고 아득한 것은 내부의 어떤 것 때문에 발생한다. 외부적인 위기는 사태가 종결되면 어떻게든 일단락되지만, 내부의 갈등이나 불안 때문에 발생한 위기사태는 자칫 잘못 건드리면 편향적이 되거나 문제가 깊어지는 경우가 있다.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고 한쪽의 이야기에만 힘을 싣거나, 문제에 대한 해결안이 쌍방이 모두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닌 경우엔 공동체가 깨지기도 한다. 이러한 조정을 어렵게 하는 제일 큰 이유가 사람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몇안되는 사람들의 모임도 때론 의견일치가 되지 않아 난리인데, 급격하게 공동체 구성원의 숫자가 불어나고 구성원의 성격이 다양해지면 그야말로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초대교회는 다양한 분파들의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남으로 말미암아, 어찌보면 외부의 문제가 아닌 내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다문화 가정으로 인해 생긴 인종갈등 혹은 빈부 격차 때문에 발생한 계층갈등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다시금 본문을 관찰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발생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왜? 그때 12사도가 놀러가고 없었나? 그림자만 밟아도 권능이 베풀어지고 귀신이 떠나고 병이 고침받고 능력이란 능력은 세트로 가지고 있는 12사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원망과 시비가 생겨나고 갈등이 발생한 것일까?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기둥같이 목회하는 초대교회인데... 왜 문제가 있어? 뭐가 잘못된 거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정말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이때까지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핍박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핍박을 통하여 더 자유로운 복음 전도의 길이 열렸고 눈치 볼 염려를 덜었기에 외려 전화위복이었다. 기쁨과 감사함이 지금까지의 분위기였는데, 느닷없이 갈등과 원망이 첨예화되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것같은 상황이 낯설다. 하지만, 2절에 열두 사도가 두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6장 초반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모습의 성령충만을 발견한다. 열두 사도들은 곤혼스럽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본문은 소개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7절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갈등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단추는 사도의 직분 혹은 사도의 명성을 이용하여 사건을 덮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은사가 많거나 혹은 유명세를 엎고있는 사역자들에게서 흔히 범하는 실수가 문제를 정확하게 혹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에 비하면 별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즉 사소한 여러 문제들 중 하나이기에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로 탁 덮어버리면 깨끗하게 해결될거라는 생각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실 갈등과 원망은 흔하게 나타난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끼리 더불어 살다보면 이런 반응은 다반사다. 그래서 작은 문제로 여긴다. 교회의 지도자가 탁월한 영성과 설교 그리고 은사가 많으면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히,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될 일이라 여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래서 갈등이 해결되기도 하고 가라앉아 평온을 되찾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엔 겉으로는 잠잠하게 해결된 듯 보이지만, 갈등의 골이 여전히 남아 다른 모습으로 곪아가는 경우도 있다. 때론 기도하고 영적 은사로 덮고 지나갈 일이 있지만, 대부분은 양상이 다르고 해결을 위한 접근을 위해 좀더 면밀한 반응하며 해결책을 달리 해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지만 교회 공동체는 빈번하게 이런 건강한 상식적 접근을 외면한다. 그 이유는 너무 영적이고 너무 흥분된 은사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획일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처방전이 기도를 좀더 열심히 더 오래하는 것이거나, 헌금을 비롯한 여러 헌신들의 부족하기 때문에 좀더 열심을 내는 것으로 모아진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열두 사도는 이러한 유혹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기도를 많이하고 은사가 넘쳐나고 있다해도, 지금 일어난 이 갈등과 해결책이 자신들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문제에 접근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일견 보기에 쉬워보이는 태도같지만 사실 참 어려운 결단이다. 뭐 시쳇말로 별볼일없는 평범한 사역자라면 당연한 태도로 여기겠지만, 교회 공동체가 어마어마하고 평소 구름떼같은 양들이 설교와 능력을 사모함으로 모이는 곳의 지도자라면, 대단히 힘든 결단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나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이 고백이 교회를 살린다. 한걸음 물러섬이 교회 공동체의 문제가 곪아 터지는 것을 방지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내가 다 해결하고 담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에서 정직하게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자녀 문제나 재정적 어려움, 건강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당면한 쟁점 사안들을 믿음 좋은 내가!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능력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작 땀흘리고 얼굴 벌개지는 난처한 상황 가운데로 진입해야 할 일을 골방에서 붙잡고 기도로 해결하려다가 시기를 놓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새창조의 결과물이지만 아직은 우리는 문제 많은 사람에 불과하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선물로 받아 누리는 매우 영적인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천만한 사람일 따름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섣부른 하나님 흉내 내기에 너무 심취해서는 곤란하다. 내가 하나님처럼, 주님같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엄청난 능력자같아야 한다는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은사가 많아도 사람이다. 실수를 밥먹듯하는 연약한 인생이다. 기도의 능력이 탁월하고 믿음의 역사가 매순간마다 일어날 만큼 영향력있다해도 한방에 훅하고 가는 육신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은사주의는 신비주의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하기에 늘 조심해야 한다. 어쩌면 내게 능력없음과 너무나 작은 믿음의 역사뿐인 것이 오히려 멀리보면 더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 왜냐면 내가 약할 때 더 강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지나친 은사의 몰입은 자칫 섣부르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무당이다. 하나님 자리를 대신한 것들을 주님은 진노하신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열두 사도들은 그렇게 많은 영적 은사들로 해결못할 문제가 없어 보이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기둥같은 듬직한 존재였지만,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과 지혜 없음을 인정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2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재정 출납)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기꺼이 낮아짐과 내어놓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들의 믿음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살리며 회복시킴이다(7절). 오늘날, 기득권을 유지하느라 과거의 명성을 다 갉아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안타까울 정도다. 나도 훗날 천신만고 끝에 얻은 기득권이 몇 있다면 쉽게 내어놓고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기도하고 소망하기는 성령께서 그날에도 충만케 역사해서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뜻 내려설 수 있기만을 소망할 따름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열두 사도들의 제안은 이렇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2~4절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대외 사역을 감당할 7명의 일꾼을 임명하여 재정 출납을 비롯한 실무 부분을 담당시키고, 자신들은 드러나지 않지만 정작 중요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돈쓰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돈을 쓰고 모양새 나는 일들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중에서 세워진 일곱 일꾼들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교회 공동체의 행정과 재정 그리고 대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 사역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설교하는 일과 같은 비중의 일들이다. 그러므로 일곱 일꾼에게 요구되어지는 첫 번째 자질은 행정학 학위나 재정적 실무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있지 않다. 똑같은 교회 공동체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요한 자질은 사도들과 기실 동일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해야 함으로 덧붙여지는 자질이 필요한데 그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여러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쪽 혹은 한 부류의 찬사를 받기엔 다소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힌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며 이 사람이라면 괜찮아! 공정해!하는 칭찬 받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이러한 자질은 평소 대인관계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것저것 눈치 안보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소신껏 잘 처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도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인 외지인이기에 말씀과 은사적인 측면에서는 탁월한 주님의 사도 역할을 감당하지만,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각지에서 유입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문화나 정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낯설기도 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열두 사도들은 초기 역할은 사실상 어느정도 마무리되었고, 이제 새로운 질서와 일꾼이 세워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느꼈을 것이고, 성령께서도 사도들의 심령 가운데 감동감화하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래서 현재 예루살렘 공동체의 정서와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필요에 부응하여 공정하게 재정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의 출현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탁월한 성령충만의 결과인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세워진 일곱 일꾼들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유대교에서 입교해온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다. 이 이름들은 모두가 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이름들이다. 즉 이들은 한 세대나 그 이전 세대에 팔레스틴으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었고, 심지어 이방인이었는데 유대인으로 개종한 안디옥 출신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선출된 일곱 일꾼들이 모두 다 헬라파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었다는 것도 매우 특이한 일이다. 문제를 제기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히브리파 사람들의 특별한 조치이거나 배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약자의 처지에서 피해를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감각을 십분 활용하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교회 공동체는 정말이지 이런 모습이어야만 한다. 또한 이런 양상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먹는 사람만 계속 해먹고,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유리하다면 사두개인이 설쳐대는 유대사회나 오늘날 우리 시대와 무엇이 다를까! 돈과 권력 그리고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독차지하고 그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당연시한다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고 성령께서는 안타까워할 것이다. 예수와는 상관없는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는 이처럼, 사도들이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히브리파 사람들도 기꺼이 상대방을 존중하며 세워주고, 일꾼으로 세움받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기회를 잡았다고 우쭐대거나 복수의 기회로 삼지 않는 이들의 모임이다. 누가 먼저 장로가 되든, 어떤 일이 누가 맡든지 간에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가 있는 이들에게 먼저 세우고(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특별히 공정한 사람-칭찬받는 이들이 섬겨야 할 민감한 자리엔 인간적인 배경에서 아무런 연이 없더라도 세울만한 자를 심어 섬길 기회를 나누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사자와 어린양, 독사와 어린아이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땅의 작은 천국 -&amp;nbsp;교회 공동체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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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 일이 어찌 될까...? - 사도행전 5:12~4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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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4-16T22:26:17P</published>
      <updated>2011-04-16T22:26:17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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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채덕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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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tartFragme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5:12~42 - 24절 ; 이 일이 어찌 될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다시금 사도들이 체포되어 구금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앞서 베드로와 요한이 40년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관련하여 공회에 잡혔던 전례가 있었지만, 이번엔 경우가 많이 다르다. 그때는 베드로와 요한뿐이었지만, 이번엔 사도들이라고 지칭되는 것으로 봐서 전부 혹은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일전엔 단지 위협만 당하고 돌아왔지만 이번엔 채찍질까지 당하고서야 놓임을 받았다. 두 경우 모두 공회에 붙잡혔고 재판을 받은 것은 동일하지만, 그 양상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체포당하는 이유가 전혀 다른 동기이며, 재판의 진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의미도 색다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앞서 베드로와 요한의 공회 사건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 상황이었지만, 그 심각성이 많이 감추어져있었다.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은 표면적이겠지만, 상당히 충성스럽고도 대의명분도 있는 문제를 제기했고 또한 해결하기 위해 뭉쳤었다.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임하셔서 감사하게도 그 강력한 진을 말씀과 지혜로 허물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이번엔 체포 동기부터가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그 위험성이 앞서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한 상황에서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광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7, 33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라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감정적으로 격앙된 분위기는 통제가 어렵다. 술 취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과 같다. 이성을 잃어버려 군중심리에 쉽게 휩쓸리는 아주 위험천만하다. 17절에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났다’고 한다. 사두개인들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실권을 잡은 당권파들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대중적 인기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실질적인 권세는 작지만 대중적인 지지와 인기는 상당했었다. 그렇잖아도 바리새인들의 대중적 존경심에 대해 질투하던 사두개인들에게 있어, 새롭게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시피하는 사도들은 눈에 가시처럼 귀찮고 성가신 존재들로 부상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2~16절의 보고에 의하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남으로 큰 무리의 남녀가 모여들었고 또한 베드로가 지날라치면 혹시라도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덮이기를 바랄정도로 선풍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갈릴리 촌놈 몇이 자신들은 누려보지 못한 대중적인 지지와 인기 그리고 존경까지 한꺼번에 받는 모습은 바리새인들에게 느끼는 적잖은 질투심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야 받을만한 구석이라도 있어 누린다해도,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학문 없고 가난한 촌놈들에 불과한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헤아릴 수 없었고 속상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정도가 지나쳐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들은 사도들을 수색하여 모조리 잡아들인다. 그리고는 또다시 공회를 소집하여 사도들을 이번 기회에는 싹을 잘라버리고자 이를 갈며 재판을 진행한다. 이번엔 심문할 필요도 없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일전에 있었던 재판 결과를 사도들이 명백하게 위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를 보아도 별문제가 없었다(28절).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또한 대제사장의 질문에 답한 베드로의 답변은 지난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사두개인들의 화를 더 돋우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렇잖아도 결과가 어떻게 치닫는지 우려스러운 상황이 더더욱 더 앞을 예측하기 힘들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은 이러한 다소 꼬여버림으로 어떻게 매듭을 풀어내야 할지 난감한 형편에 놓인 사도들과 성령의 개입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은 언제나 미흡한 것 같고, 좀 더 강력하게 힘 있게 역사해주시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40년 앉은뱅이와 같은 엄청난 문제꺼리가 성령의 은혜로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거나 해결되기를 늘 갈구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있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하기도하고 애써보지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상황이 심각해지거나 파탄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정이나 개인사의 경우에도 성령은 언제나 늘 조금만 도와주시는 것 같아 갈급한 심령으로 조바심 낼 때가 많다. 팍팍 밀어주시면 시원할 텐데 늘 엇박자인 것 같다. 필요 없어 보이는 때에나 혹은 타인의 경우에는 팍팍 과감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내 문제에 있어서만 늘 부족하거나 아예 도우심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난감하다. 그래서 괜히 변명과 자기 합리화에 바쁘거나, 좀 더 열정적인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싶어 믿음 생활의 괜한 열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는 본문의 관찰을 통하여 성령 충만의 또 다른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늘 한 가지 두 가지 모습으로 획일적이고 기계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이 아니라, 때론 우리를 더 생각하게 하고, 한발걸음 더 나가기 위해 좀 더 교묘(?)하게 임하시는 성령의 움직임(개입)을 발견하기를 소망한다. 본문에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발견한다면 내 믿음에 대해 괜히 자책하거나 비교함으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들이 붙잡혔다. 사도들이 한자리에 있다가 손쉽게 모조리 잡혔든지 아니면 이곳저곳 흩어져 일하다가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체포 작전으로 하나 둘 붙들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다 잡혀왔다.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잡혀오면서도 갑작스런 체포 이유가 채 헤아려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성전 감옥에 모였을 때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리고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해 의논했을 것이다. 마치 24절의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의 의논처럼... ‘이 일이 어찌 될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초대교회 공동체도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리라.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가 아닌,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사도들 전체에 대한 체포와 구금은 공동체를 술렁거리고 기도하게 했을 것이다. 제각각으로 걱정하다가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성전 감옥 근처에서 걱정스럽게 이 사태가 해결되어 풀려나기를 소망함으로 몰려들었다. 해가 저물어도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새벽에 사도들이 천사에 의해 비밀스럽게 풀려났을 때, 기쁨으로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생명의 역사로 인도하실지에 대한 가르침과 확신 가운데 설교하는 것을 듣기까지 함께 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에서는 이처럼 옥문이 비밀스럽게 열리는 기적이 세 번 나오는데(5:18~23; 12:6~19; 16:25~34), 그 각각의 경우에 역사하시며 옥문을 여시는 의미가 상이하다.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왜 여기까지만?’하는 것이다. 19절에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었다. 간수도 모르게 그리고 열쇠를 부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였다.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문을 통하여(하나님의 방법&amp;amp;개입) 사도들은 탈출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탈출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껏 밖으로 나와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성전으로 들어갈 것과 그곳에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지시하신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감옥이 아니기는 하지만, 금방 발각될 수밖에 없는 곳으로의 이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는 사두개인의 신경 거슬리는 가르침의 사역을 하라는 성령의 지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자 사두개인들의 시기심 때문에 붙잡힌 줄 대충 감으로나마 알고 있는 터인데,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명령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들은 호랑이 굴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걱정하며 새벽까지 서성거리고 있는 초대교회 교우들과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쳤다(21절).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여기서 주의 사자의 조치, 감옥을 나오게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성령의 역사로 보인다. 정황상으로 보면 오히려 잠도 못자고 오히려 새벽부터 일한 샘이고, 체포된 상태에서 잠시 놓였다가 다시 들이닥치는 성전 맡은 자들에게 곧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짐의 결과로 보면 원래상태로의 복귀로 비춰진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다고 성령께서 일을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사도들이 뭔가 밉보여서 조금만 도와주시려고 작정하심으로 약간 골탕 먹일 작정이었을까? 우리가 이런 경우에 처하게 될 때 바로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성령께서 통이 작아서 조금만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고, 아니면 내 믿음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외면하시거나 깔끔하게 처리해주시지 않음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는 하셨는데 뭔가 일이 깜끔하게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문제가 남은 것 같고 혹은 원래상태로 돌아가서 도루묵이 된 것 같아 보이는 일견 답답한 상황 가운데 낙심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며 오히려 내가 기대한 것 보다 더 멋지고, 내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임재를 낌새채는 것이 핵심이다. 본문의 사건에서 요청되는 성령의 충만, 임재는 바로 이런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보이는 현실은 여전히 문제가 있고, 원 상태로 돌아온 듯 보이는 답답하고 두려운 현실 너머에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눈치 채고, 그의 눈치 없어 보이는 요구라 할지라도 순종함으로 그분의 사역에 보조를 맞추며 묵묵히 참고 걸어가는 모습이 성령 충만한 믿음의 여정인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나님의 여전한 일하심을 상황 종료로 착각함으로 투정하거나 원망하고, 주님의 요청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분석함으로 거부하거나 수정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에 어깃장을 놓고 마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그러고 보면 나는 얼마나 많은 어깃장을 놓으며 살았는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린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옥에서 놓임 받아 성전 마당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새벽 시각에 사두개인들도 바쁘다. 그들도 새벽 일찍 공회를 소집했다. 밤에 재판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밤을 새면서까지 그들을 기소할 적절한 명분과 처리 방안을 의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벽부터 공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 공회를 개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명령했다. 그러나 사도들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보고한다.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히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설명 앞에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일이 어찌될까?’하고 당혹스럽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바로 그때, 다른 사람들이 와서 감옥에 있던 사도들이 성전에 있고 그곳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정보를 따라 곧바로 부하들을 보내어 잡아오도록 조치하지만, 강제로 못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말로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분명 이들은 도망자들이었기에 야단스럽게 몽둥이 들고 때리며 잡을 일이지만, 주변의 백성의 눈치도 있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26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어쨌든 다시 잡아들여 공회에 세운다. 그리고 심문한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심문에서 밝히는 사도들의 죄목은 로마 정부가 공인한 자치 귀족들에게 로마 정부가 시행한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을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질서를 깨뜨려 사회 불안을 조장했다는 것이다(IVP신약성경배경주석 참조).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즘으로 말하면, 공안사범이라는 것이다. 아주 엄중한 죄목이다. 또한 그 판결의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형벌일 것이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될 일이고 즉결로 돌로 쳐도 될 사안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이다. 외려 자신들이 오히려 돌 맞을 것을 걱정하며 조심스러워 할 판이 되었다. 베드로와 사도들도 이 정도의 죄목이면 조금이라도 주눅이 들거나 조심하며 선처를 구함으로 한발 물러설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오히려 베드로는 이어지는 답변에서 그들의 부아를 지른다. 너희들의 책임이 맞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가 하나님이 살리시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맞받아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 유대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공안사범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들의 살인과 그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신 믿음의 역사의 산 증인이라 주장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러니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기소 내용의 당사자들이라고 들먹이는 사도들을 더 이상 가만둘 수 없다고 사형시킬 것으로 논의를 모아간다(33절). 사도들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공동체도 여차하면 12사도 전체를 잃어버릴 처지에 놓인 것이다. 앞서 베드로와 요한을 잃을 뻔 한 아찔한 경우에도 가슴 졸였는데, 이번엔 12명 전체 사도가 위기에 놓인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때, 바리새인 중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 공회 중에 일어선다. 잠시 사도들을 물러나게 한 후, 공회 앞에 발언한다. 400명이 따르던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이 사람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그들과 같이 곧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요지로 상황을 무마하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가말리엘의 제안은 공회원 모두에게 옳게 받아들여져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다시금 경고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불같이 성내면서 곧 끝장낼 것 같이 달려들던 공회원들이 왜 갑자기 급선회했을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가말리엘의 지적이 옳다 하더라도 그 제안의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그때까지의 성가심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선뜻 받아들였을까?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두고두고 가시 같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발휘라고 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경제력을 가진 권력자들은 분을 내어 싸워도 결국 무엇이 이득이 될 것인가를 계산하는 고도의 정치꾼이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못내 아쉬워도 포기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내어주기도 하고, 때론 자신들의 속상함을 감추고 이해득실을 따라 정치적 결정을 수용하기도 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바리새인 가말리엘과 사두개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옥에서 사라졌다는 보고를 듣고 그들이 멀리 도망가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 이미 이 사건의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알았다. ‘이 일이 어찌될까?’(24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사도들을 다시 잡아들일 때도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돌멩이 소요사태를 예측했던 것이다. 밤을 새워 의논한 기소 내용에 대해서도 끝까지 주장하여 사형에 이르게 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근거와 불타는 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말리엘의 상황 분석 앞에 한발 물러선다. 가말리엘은 먼저 조심할 것을 주문한다(35절).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왜냐하면 드다와 유다의 경우 정치적 세력화되었던 백성들과 같이, 지금 바깥에서 사도들을 걱정하며 성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전격적으로 예수당을 만들어 냈을 경우의 곤란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별것 아닌 이 사람들을 괜히 섣불리 죽이면 초대교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당으로 뭉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다와 유다처럼, 제풀에 곧 지쳐 쓰러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혹시 만에 하나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고 건전한 영적 운동이라면 우리들처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결과적으로 사도들은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당해야 했지만, 42절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자신들이 예수의 증인됨의 사역을 잘 감당했음에 감격하며 기뻐한다. 정말이지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지혜와 정치적 압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열매를 성령께서 맺게 하신 것이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도해도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제재가 없게 된 이상할 만큼의 정치적 사회적 자유!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바로 조금전만해도 성전에서 금지되어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게 했던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도심의 가르침이, 바로 한순간 상황이 반전되어 이제는 자유롭게 외치고 가르쳐도 되는 현실이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6~13&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5장17절 부터의 사건은 이처럼 의외의 성령 충만의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처음에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성령의 임재와 일처리 앞에 당황스럽기까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 주눅 들거나 내가 섣불리 판단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동역하듯이 하나님의 길과 뜻이 나의 길과 뜻과는 다르지만 결국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을 믿음으로 불리해 보이는 현실 가운데로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걸어가는 순종의 삶이 의외의 하나님의 결과를 만들어 냄을 경험하는 것이다. 마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주님께서 걸어가심과 같이... 비록 넘어지고 넘어 진다하더라도!&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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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요셉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 사도행전 4장~5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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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4-05T16:15:41P</published>
      <updated>2011-04-06T10:08:02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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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초대교회는 사도들의 무사 귀환으로 말미암아 크게 고무되었다(행4:23).&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큰 화를 입을까하여 가슴 졸였다가 오히려 성령께서 뜻하지 않은 피할 길을 열어주심과 상황을 반전시킨 결과 보고에 하나님께 찬미한다. 또한 어떤 위협이나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맛봄으로 그들은 더욱더 담대함으로 기도하며 손을 내밀어 예수의 이름으로, 잊히고 가려진 40년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는 계기로 역사되었다(23~31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급속한 복음의 전파 결과로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이어 소개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lt;사도행전 4:32~37 5:1~11&amp;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 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소 부담스러운 사건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자신의 땅을 팔아 헌금한 부부가 약간의 돈을 남기고 헌금했다는 것이 들통이 나서 그만 그 자리에서 3시간 간격으로 즉사한 기사이다. 하나님 앞에 거짓말 했다는 베드로의 지적이 있지만, 사실 오금이 저린다. 하나님 앞에 한두 번 거짓말 안하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이것보다 더 큰 것도 약속하고 작정하고 결심했다가 어긴 것이 어디 한두 건 밖에 없을까! 이런 식으로 죽어간다면 나는 열 번 아니 백번은 더 죽었을 일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의 기사는 우리가 헌금을 더 많이 하게끔 독려하기 위함이라거나, 아니면 목회자들에게 대들거나 속이는 것이 화를 부른다는 식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집팔고 냉장고 팔아 교회에 헌금하고 충성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 조성용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셉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기사는 앞선 본문 - 공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섰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초대교회의 위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요셉 바나바도 땅을 팔아 헌금했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땅을 팔아 헌금했는데... 요셉 바나바는 별문제 없이 통과했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음이 발각되어 죽었다는 결과에 대함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드러난 표면적인 문제 밑에 깔려 잘 보이지 않는 초대교회의 형편과 성령충만과 임마누엘 공동체로서의 위기가 핵심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왜 이토록 처참하고 끔찍한 결과(부부의 급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이 시점에 이런 참담한 모습으로라도 드러나야만 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이 부부의 거짓말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고, 그 원인이 베드로 사도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부렁을 만들어냈음에만 원인을 돌린다면, 그저 두려움을 자아낼 따름이고, 목회자들이나 말씀을 사용하는 이들이 장차 평신도 위협용으로 본문을 언제든지 각색하기 쉬워진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겁주고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교회 공동체 가운데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위기를 제대로 짚어내고, 성령의 충만하심과 임마누엘 현장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어떻게 성령 충만의 은혜로 극복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공회 앞에 섰던 그 공교한 위협과 위기와도 같이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를 분간해내고, 그 위기에 필요한 성령 충만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알아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와 삶에 적용해가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4:32~35절의 상황이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자신의 땅을 팔아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준 상황은 일시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시기는 급작스럽게 제자의 수가 늘어나는 영적 폭발기였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남녀의 무리가 5000명 혹은 큰 무리라고 표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모여들었다. 후에 7집사를 따로 세워야 할 정도로 정신없는 과도기였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도심 옆의 광야 어딘가에 집회 장소를 따로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넓은 장소인 성전에서 모임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정착할 때에 있었던 사경회처럼, 사람들이 몇날 며칠을 모여서 함께 밥해먹으며 하나라도 더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모함으로 모인 집회 장소에서 사도들은 가르치고 설교함에 집중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처럼 급작스러운 수많은 초신자들을 수용하고 가르치며 제자로서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몇 백 명 정도의 수련회를 가서도 챙겨야 할 것과 하루 세끼 밥해먹고 뒷감당하는 일이 여간한 일이 아님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규모가 몇 백 명을 넘어서 천단위로 가면 전문급식업체를 섭외하지 않고서는 수련회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가 된다. 간단하게 먹는다 쳐도 몇 백 명이 하루 종일 매달려서 빵굽고 배식하고 식수 조달함으로 잠시 쉴 틈도 없다. 당시엔 설거지 할 일은 없었으리라해도 만만치 않은 섬김이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문제가 있다. 몸으로 떼운다하더라도,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당장 부딪히는 문제가 재정문제다. 첨에는 도시락 싸온거 나눠먹고, 가져온 돈을 서로 헌금하여 밀가루 사고 빵산다한들 금세 재정은 고갈된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수천 단위의 열정어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지속적인 가르침과 설교를 듣도록 배려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한두 끼 정도는 굶고 들으수있지만, 철부지 아이를 데려왔을 사람들이 어른은 하루 이틀 굶고도 말씀 듣는 다해도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배고픔 앞에 장사 없다. 집에 갈 수밖에 없고 사경회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 40년 앉은뱅이와 같은 갈급한 심령들이 예수의 말씀과 사도들의 성령 충만한 가르침에 채 무르익기도 전에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소란스러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아무리 은혜로운 복음이라해도 빵이 없어 배고프면 들어가지 않는다. 빵과 복음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 요셉 바나바는 이 상황을 읽었다. 갑작스러운 은혜의 기회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하여 특별히 가난하거나 배고픈 이들은 그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그저 아이들의 보챔과 고픈 배를 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다. 가지고 있는 땅을 판 것이다. 빠른 결단과 신속한 헌금 외에는 초대교회의 은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 판단은 적절했다. 당장 목돈이 필요했던 사도들에게 요셉의 땅값은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식량과 땔감을 구입하여 조리하고 먹임으로 어쩌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절실히 목돈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그 고비가 애타는가를 알 것이다. 당장 메워야 일이 해결되거나 잔금이나 이자를 기한 내에 맞추어 내는 일이 사람을 얼마나 피말리는 일인지 사노라면 안다. 이를 경험하여 알면 누군가의 절박한 속내를 보는 눈이 열린다. 이는 성령 충만함으로 40년 앉은뱅이를 볼 수 있게 여시는 성령 충만 없어도, 그저 보이고 헤아려진다. 그러나 보인 다해도 선뜻 내 땅을 팔아 메우지는 못한다. 그저 안타까워하고 공감해주기까지는 해도 내 소중한 자산을 아낌없이 팔아 보태어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바나바는 볼 수 있는 경험과 눈이 있었고 또한 그 위기의 순간을 그저 말과 걱정만으로 쉽게 땜질하고 지나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선뜻 팔아 사도들의 발앞에 내밀고 있음이 그의 탁월함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바나바가 사도행전을 통하여 보이는 꾸준하면서도 신실한 동역과 섬김은 그저 그가 성격이 좋거나 운이 좋아서 그런 섬김을 보인 것이 아님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비전과 섬김이 준비된 사람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셉 바나바의 섬김이 필요한 일이고 또한 지속적으로 이러한 섬김이 있어야만 초대교회가 유지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이 알려지고 공감대가 형성되자, 점차로 자신의 재산을 헌금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우리가 요즘 드리는 십일조와 감사헌금 같은 연보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을 종교적 의무로 꼭 해야 된다 고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물질을 교회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헌금하기 시작한 것이다(35절).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은 이런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십일조였으면 좋았을 것을... 전부를 드리는 헌금 행렬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교회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아낌없이 팔아 내어놓는 거룩한 연보 운동에 도전받은 것이다. 땅을 팔았다. 평소에 만져보지 못했을 거금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다 드리기에는 너무 많다싶기도 하고, 땅값을 잘 받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얼마간 제하고 연보를 해도 전부라고 사람들이 여길만하다고 생각하고는 땅값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헌금하기로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많은 교우들이 사도의 발 앞에 자신들이 준비한 연보를 두는 것처럼, 아나니아가 자신의 땅을 판 값을 사도의 발 앞에 두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본문에서 소개되지 않지만, 자신의 소유한 땅을 판 대금 전부라고 소개하면서 내어놓았을 것이다. 이때 진즉에 일부분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전부에 동참한 바나바 같은 기특하고 믿음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리고는 기대했을 것이다. 사도들이 칭찬하면서 기쁘게 자신의 연보를 받아들이며 안도해하는 모습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있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당장 한 푼의 돈이 아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재정 상황이 지출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걸려있고, 수입은 정기적인 헌금이 아닌 부정기적이고 자발적인 연보에 기댄 형편이기 때문에 성도 중 누군가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선뜻 거액의 헌금을 할 때면, 정말이지 큰 안도와 주님의 채우심이라 여기면서 기뻤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기 때문에 눈멀 수 있다. 상황이 절박하고 절실했기 때문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수 있었고 돈의 출처에는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아나니아가 땅을 판 대금이라고 들고 헌금했을 때, 성령께서 베드로의 눈과 관심을 여셨다. 마치 40년 앉은뱅이를 성전 미문에서 제대로 보게끔 비전의 사람을 삼으신 것처럼, 큰 목돈 앞에 그저 반갑고 기쁘게 받으려는 베드로에게 그 돈의 이면을 보게 하셨다. 베드로가 평소에 경제에 아주 눈이 밝아서 이 지역 땅값에 훤하기 때문에 웬만한 땅값은 척척 알아맞힐 수 있는 공인중개사 같았기 때문에 아나니아의 땅값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베드로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심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다급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며 사역을 지속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제일 중요하게 보이는 현실 가운데 정신없었을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충만하심으로 임재 했다. 그리고는 아나니아에게 질문한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질문의 요지는 왜 땅값 전부를 내지 않았는가가 아니다. 기실 성도들이 연보하는데 왜 이것밖에 안하는가를 따진다는 것이 우습지 않는가! 십일조를 함에 있어서, 내가 당신의 연봉을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정직하게 연보해라고 다그친다면 그건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다.&amp;nbsp; 본봉에서 세금을 떼고 십일조를 내야하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점검하고 기준을 세우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나 하는 일이다. 십일조를 하든 말든, 십의 5조를 하든 말든 그 일에 관여할 바가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은 공동체의 필요와 유지 그리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자신이 정하여 연보할 따름의 문제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의 지적은 땅값의 일부를 숨긴 동기에 관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떤 믿음으로 헌금에 동참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땅값의 얼마를 헌금하든 그것은 부부의 판단과 결정이지만, 연보를 하는 동기와 믿음은 하나님 앞과 공동체 앞에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에 있어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것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처럼, 헌금의 동기가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내고 종교적 의무를 행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다른 유형의 이득(인정받음이나 바나바와 같은 헌신 그룹으로 포함되는 것 등)을 희망하는 것이라면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도전이며 이간질이다. 마치 여호수아의 정복 행로에 있어 아간의 작은 범죄가 전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과 같다. 이 시점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 이면의 아간과 같은 범죄를 주목하지 않고, 단지 연보된 물질(땅판 돈)만을 보고 기뻐하며 칭찬하고 넘어갔더라면, 아나니와 삽비라 그리고 이어질 수많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이들의 심령에 새겨졌을 큰 불신과 가소로움... 임마누엘이라고 주님이 다스린다고 하더니만, 속여도 모르네...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불의의 삵이든 뭐든 간에 헌금 많이 하니깐 다들 알아봐주는군! 믿음 좋은 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군. 허허 내가 실상 어떻게 사는지 알면 까무러치겠네.. 흐흐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께서는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는 문제임을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좋은 동기와 그래도 나름 거금의 헌금을 드리는데 그냥 좋게 타일러서 다음엔 그러지 않도록 단단치 조치를 취합시다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아나니아의 죽음을 통해서 알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베드로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냥 질문하고 지적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요지로 말했을 따름인데 자기 앞에서 혼이 떠나버리는 성령의 역사 앞에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우리도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많은 것처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성령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당장에 제거하심으로 공동체의 순결과 기초를 믿음에 세우시는 역사 앞에 당황스럽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건의 중대차함을 깨달아가고 교우들도 점점 왜 이렇게까지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이해와 가르침으로 더욱더 임마누엘 공동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가치를 새롭게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11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성령 충만의 네 번째 양상은 이처럼 교회의 순수성과 믿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겉모습에 속지 않고, 중심을 보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는 하나님의 눈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일날에만 얼마나 믿음이 좋은 모습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일날의 그 거룩하고 믿음 있음이 진실로 의미 있으려면, 6일의 평일, 일상의 삶이 얼마나 믿음위에 선 진실한 모습인가에 달려있음이다. 주일날 드러나는 외모는 여섯 날의 중심이 모여 진실하게 드러날 때, 우리는 산다. 공동체는 건강하게 다음주간을 맞을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여, 사기치고 번 돈이며 타인을 아프게 하고 벌어들인 눈물 맺힌 아픔을 보지 못하고 그저 많은 헌금액수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평가하며 가치를 부여한다면, 사탄이 가만히 가만히 그러나 더 깊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갉아먹고 마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느덧 암세포 같은 사탄의 것으로 대체된다면,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촛대가 옮겨지는 사태이지 않겠는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크고 화려하고 역사가 깊다한들 주님의 촛대가 옮겨져 버리면, 마치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다시 짜게 하지 못하는 돌멩이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소망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는 주님의 백성 됨을…….&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급하다고 아무것이나 주워 먹어 배탈 남이 아니라, 굶어 배고프더라도 살아있기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재정적으로 쪼들리고 곧 문 닫을 것 같은 안절부절로 지치더라도, 정직한 과부의 한두 푼 연보에 만족해할 수 있기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의 몸된 교회가 그깟(!) 돈 때문에 문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많은 그러나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아나니아의 풍요로움에 주님의 촛대가 옮겨진다는 믿음의 확신 위에 단잠을 자는 이 밤되기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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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너희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사도행전 4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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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3-30T17:05:57P</published>
      <updated>2011-04-05T11:35:01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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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4장(1) - 너희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본문의 핵심은 위기다. 어쩌면 사도행전 전체에 있어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위기감을 본문에서 잘 읽어내지 못한다. 그저 많고 많은 흔한 일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다. 사도들이 한두번 잡혔어? 많이 잡혔고 그때마다 기도해서 쨘하고 넘어간 적이 많잖아...?라고 생각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가 성령 충만한 모습을 평가절하 혹은 진정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있다. 절실하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신경하여 그 실체를 헤아리지 못함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네 살림살이에서도 진정한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절실함을 깨닫지못하거나 무시함으로 오히려 문제를 키우거나 변형시켜 훗날 큰코 다치면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작은 문제, 흔한 일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쉽게 그저 만만하게 해오던 방식대로 별 생각없이 처리해버린다면, 문제는 어느덧 꼬이고 상처는 곪는다. 교회나 가정에서 벨벨 꼬일대로 꼬여 더 이상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보면 한숨이 난다. 진작에 좀 어떻게 조치를 취했어야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해뒀을까 싶은 난해함에 머리를 흔든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 출발점이 일상의 평범한 사건 혹은 기도하고 그저 지나가면 알아서 될일이라 여겼던 일들에 있어 성령충만의 인도를 구하지 않음으로 발생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충만은 기도원이나 어떤 근사하고 화려한 사역에만 필요한 완장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충만은 일상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관계의 끈이 맺히고 연결되는 소소한 공동체의 삶과 형편에서 매우 중요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며 닳거나 무리되지 않게하는 영적 윤활유와 같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의 상황이 위기라고 했다. 무엇이 위기인지 보이는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좀먹고 해체하며 와해시키는 가를 발견하는 것이 먼저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장1절에 사도들은 백성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이 어떻게 즉각적이고 실효적으로 드러나는 가에 대해 모처럼의 호기를 얻어 열심히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중이었다. 그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개입한다. 말씀을 들은 사람의 수가 5000명이나 되었지만, 이러한 막대한 사람들의 눈길을 무시하고 체포할수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권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0년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로 말미암아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죽은 자의 부활 역사에 대한 설교를 시비걸어 옥에 가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부활과 천사 같은 실체가 없다고 확신하는 지배층인 사두개인들은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식민지배와 로마 당국과의 줄다리기에서 살아남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과 더불어 자신들만의 질서를 유지해 오던 자들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들의 눈에 가시가 생긴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의 세몰이를 하는듯한 베드로와 요한이 부담스러웠다. 문제가 있든 없든간에 오랫동안 고착화되고 안정된 그림이 여기저기서 깨어지고 웅성웅성 거림이 발생한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여기에 우리의 위기가 깔려있다. 우리는 기실 믿는다하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며 사노라 하면서도 예수로 인한 근본적인 변혁(변화)엔 부담스러워한다. 구약시대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을 바꾸어 가신 손길을 이해하면 보다 분명해진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광야는 텅빈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은 변혁의 공간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품나는 심심하고 무심한 나그네 여정이 아니라, 한치앞을 예측못하는 두려움과 실수에 대한 끊임없는 교정의 시간들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광야는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미래 지향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 가운데 적용되어지는 영적 용광로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여 광야 40년은 나 자신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있어 하나님의 열정으로 물들어가는 배아기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기회 있을때마다 광야로 돌아가 초심의 믿음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자신의 선지자를 훈련시키거나 다윗을 왕으로 세워가던 내내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은 없고 하나님만 계시는 광야로 광야로 흘러가게 하셨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고요한 광야 어둠에서 작은 스치는 소리에도 온몸의 촉각이 곤두서듯이,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지며 그것이 어떤 요구라 할찌라도 수용하며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 - 세상이 감당치 못할 영적 거인들을 잉태하셨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우리는 도시에 머물러 산다. 그것도 너무나 치열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시간 내어서 한번씩 곤한 영혼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지만, 오히려 더 시끄러운 정치와 이해관계와 봉사 등으로 이내 진을 뺀다. 채 여물고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온다. 먹고 살기위해 악착같이 돈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피터지게 싸운다. 이리저리 얽혀서 산다. 밤에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그 열기가 식지 않는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는 다 사두개인 같음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부활이니 천사니 뭐니 하는 것이 점차로 관심이 옅어진다. 말은 고상하고 하늘을 내닫지만, 온통 관심은 현실의 기득권과 자기방어 그리고 금전적 이득에 다름아니다. 당장 내 앞에서 5000명이나 감명받고 신기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베드로의 설교에 목맨다해도 내가 감당치 못할 급격한 변화나 손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고상하다해도 외려 내게 걸림이 된다면 제거하고 지워야 할 바에 불과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내 삶과 믿음의 진정한 위기는 사두개인화(化)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한 영혼에 대한 아름다운 관심과 열정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일이다. 정작 시스템이나 효율 그리고 실질적 이익에 눈멀었다. 사두개인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에서 비교하여 찾는다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만을 인정하고 실생활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 세상적인 부와 권세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한껏 받은 사람들과 비견될 것이다(사두개인은 대부분이 귀족 계층이고 제사장 출신들이었고 실제적인 정치적 권세와 경제적 이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겉으로보기에는 완벽하다. 하나님의 말씀도 오염없이 순수하게 지킬려고 애쓴다. 닮았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규칙적이고 거룩한 예배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닮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세상에서도 용이 되려하고, 가당찮다싶으면 뱀 대가리라도 되기를 용쓴다. 닮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뭔가 이루고 누려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여김으로 출세와 부흥에 올인한다. 닮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민족과 공동체의 대의명분이 더 중하다 생각하므로 한 영혼의 눈물이나 가치는 희생양 삼기를 밥먹듯한다. 내심 닮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처럼,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의 뜻이 사두개인들에게는 무가치하다. 외려 그들은 풍잔등화 같은 자신의 민족을 어떻게든 되찾고 지키는 것이 더욱더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천하를 얻기 위해 일정부분 희생을 인정하고 허용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점차로 우리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불안하다. 광야로 광야로 나아가서 비고 빈 영혼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터이나... 실상은 도시로 도시로 온갖것을 채우고 채워넣어 넘쳐나는 쓰레기를 돈주고 버리며 내 것을 유지하려고 혹은 좀더 차지하려고 발부둥치는... 40년 앉은뱅이가 어찌 되었든 말든 그저 시끄러워지고 신경 거슬리는 것에만 주목함으로 얼른 제자리로 주저앉힐려는 과감한 시도! 또다시 그 남자가 30년을 더 주저앉아 살든 말든 그것이 1000년을 주저앉아 울든말든 나와는 기실 관계없음에 선을 긋는 잔인함을 소유한 나!를 발견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랑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절규가 섬짓하다. 왼편으로 혹은 염소로 분류하시고는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하실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싶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두 번째 위기-사실 이것이 본문에서 보여주면서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는 사두개인이 우두머리로 있는 공회의 치밀함과 잔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앞서 말한것처럼, 40년 눈물이나 응어리 따위에는 별관심없다. 그저 자신들의 비위를 건들었고 자신들이 애써 세워놓은 질서가 흐트려지는 것을 속히 바로잡는것에 온 관심이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래서 관리, 장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 그리고 서기관 모두가 이튿날 공회로 모인다. 총출동이다. 이참에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를 쏙아낼 작정을 하고 모였다. 그리고 지혜롭고도 치명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질문은 속내를 뜨보기 위해 그냥 툭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 관리와 장로, 대제사장들과 문중 어른들 그리고 당차고 똑똑한 서기관들이 공교히 준비한 비수다. 말 한마디 여차 잘못하면 지금 당장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초대교회를 박살내고 초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질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들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만한 묘안이었다. 성가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비책이었다. 질문의 함정을 빠져나갈 수를 여간해서 찾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자기들처럼 학문이 있고 변증법적 사유에 능한 이들만이 맞받아치거나 빠져나갈수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질문은 이렇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질문의 바탕은 신명기 13장 말씀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질문의 목적은 베드로와 요한이 다른 신을 소개하고 믿도록 부추기는 꿈꾸는 자이며 불량배임을 밝혀내려는 것과 그 결과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초대공동체를 대대적으로 핍박 내지 제거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빠져나갈 수를 미리 확보하고 발을 담그는 것에 능숙한 사두개인과 기득권자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수순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외에 그 어떤 이름도 나와서는 안되는 답이 뻔한 질문에 베드로가 생각없이 하나님께서 하셨어요하면 그저 본전에다 덧붙여 솔솔한 보너스 같은 소득이 될것이고, 예수와 같은 새로운 이름을 거론한다면 눈에 가시 같았는데 잘 됐어 하면서 제거한다 해도 누구 하나 불평할 일이 없는 깔끔한 해결책이 될 일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0년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비록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이 불량배인 베드로와 요한을 이용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평가절하하거나 오히려 경고의 나팔 역할이었다고 색깔을 칠함으로 사람들이 그 이적 자체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수도 있다. 5000명이나 그 사건에 대해 알고있고 들었고 놀라워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제대로 여호와를 믿고 있는가 시험하는 사건이었다고 방향을 튼 해석이 공인을 받고 그 일을 사주한 불량배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 추종자들은 외려 대중들의 긍휼을 기대하지 못하는 비참한 참형을 당한다해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지켰다는 자랑스러운 결단이 될수있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가 이 모든 전후사정을 파악했을까? 사태가 얼마나 공교한지... 어디까지 파장이 미칠것인가에 대한 감을 잡았을까? 조금의 낌새는 챘을지라도 일의 진행과 사태의 심각성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사실 모두를 꿰뚫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결국 부분밖에는 알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인간들이다. 전체를 파악하고 일의 진행을 어느정도 가늠한다는 정치 9단 수준은 남의 이야기일뿐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중요한 점은 다 알고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시작을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본문의 성령 충만의 양상은 시험과 환난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나타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마치 예수께서 공적생애를 시작하시기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가지 시험을 당하셨고, 번번히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겨내심과 같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또한 주님께서 파송설교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며 계산함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실 것을 약속하심을 적용함과 같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앞서 나눈것처럼, 우리 삶의 위기와 파탄 그리고 곪음으로 도려내야 하는 상황으로 진행되는 그 첫걸음이 나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재력이나 얄팍한 꼼수로 메우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40년 앉은뱅이를 거뜬히 일으켜세움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이어서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의 역사를 담대히 전함이 감사하고 뿌듯했을 것이다. 주님의 칭찬이 기다리고, 교우들의 격려가 반길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성전 맡은 자들에 의한 전격 연행과 감옥행의 고난은 예상치 못한 일로 다가왔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탄은 정말이지 얼마나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우리가 은혜 받고 좀 섰다싶을때를 노린다. 낙심케하고 당황스럽게하며 은혜를 쏟아내게 한다. 그리고 회복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도록 혼란케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얼마나 많은 기쁨 뒤에 신속한 곤란함이 뒤따르는지 눈치도 못챌정도다. 가정에서 개인의 직장터에서 우리가 얼마나 순식간에 상황이 바뀜으로 당혹스러워 하는지. 호사다마란 말이 괜스리 나오는 말이 아닌듯싶다. 우리의 기쁨과 만족은 시한부이다. 언제든지 역전 가능한 성취이며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과 같다. 주님께서 역사하셨기에 언제든 든든히 무너지지 않고 변치 않을거야했다가는 뒷통수를 맞는다.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다. 세상에서 성취되고 얻어걸리는 모든 것들은 변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수있니?하고 소리쳐봐야 별 수 없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환난의 때, 예상치 못한 문제 앞에 우리의 것을 의지하려는 신속한 대처- 임기응변을 거부함으로 오히려 광야로 나아가는 것처럼, 한걸음 뒤로 물러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함이 성령충만인 것이다. 문제 앞에 당황하다가 급하게 일을 잘 막아냈다며 자랑할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땜질이나 하려고 하는 나를 붙잡아, 성령께 메이도록 함이 본문의 베드로의 성령충만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 할 성령 충만의 양상이다. 얼마나 종종 이러한 성령충만함과 거리가 멀기만 한지 싶다. 내가 할수있을것같아서, 조금만 뭔가를 기대고 이용하면 될듯싶어서, 가지고 있는 자원과 수단을 조금만 풀면 이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것 같아서 얼마나 버선발로 뛰고 해결했던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는 이 곤란한 함정 질문에 대해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으로 대답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굉장한 수사학적 반전이다. 사실 13절에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서기관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 알았었는데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놀랐다고 한다.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형식에 있어서도 당대의 최고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수사학의 사용은 의외였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수사학에서 설득은 매우 중요한 기본자질이며 또한 유용한 수단이다. 오직 말과 몸짓으로 상대방을 움직이며 동원하는 수사학은 그 당시에 최고의 학문이었으며 식자들의 필수덕목이었다.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니라, 대중들을 설득하는 논리이며 이성적 수단이었기에 때문이다. 그런데 학문이 없는 베드로가 수사학적으로 다듬어진 질문(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을 간단히 전복시킨다. 즉 수사학적 장치물들을 한순간에 무장해제 시켜버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0년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고 의미를 전가하며,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을 불량배로 만들어 버림으로 깨끗하게 상황을 종료하게끔 고안된 수사학적 질문을 베드로는 이렇게 맞받는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수사학적 건축물의 기둥을 쑥 빼버린것과 같다. 누구의 권세와 이름이 이 사태를 불러왔느냐하는 조작된 질문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와 구원받을 유일한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나음을 입은 “이 착한 일”에 집중하도록 물꼬를 튼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착한 일에 대해서라면 대답해주겠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두개인과 제사장에 의해서 의도되고 조작된 질문의 안개를 걷어내고, 현재 지금 여기서 일어난 착한일, 놀라운 기적, 저기 뛰어다니며 찬양하고 있는 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은 강력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현장에 동참함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는 성령 충만함으로 이제 거리낌없이 이 착한 일-40년동안 방치되고 가린바되며 외면된 진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밝게 빛나는 일이 되었는지 담대하게 외친다. 너희가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건강케하였으며, 이 예수는 너희가 건축자들의 쓸모없어 폐기한 돌멩이같이 아무 유용함도 없고 집으로써의 권세도 없다 무시하였으나 오늘 지금 하나님의 집의 모퉁이 돌이 되는 권세로 세워졌고, 이 권세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선포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조작된 질문의 답변이 두렵게도 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해체되어 힘을 잃어버린 그들의 엄중한 질문은 빛을 바라고 말았다. 신명기 13장의 말씀을 적용하여 심판하고자 자세히 묻고 살폈더니(14절) 가증한 일-우리를 시험함이 아니라, 착한일-하나님의 역사임이 드러난 것이다(행 13:14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선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내 삶의 자리에서 빈번하게 그것도 고통스럽게 일어나는 환난이나 뜻하지 않은 복병들 앞에 늘 위태롭게 선 연약한 그릇들임을 기억하자. 성령의 함께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아니고는 한순간도 제대로 설 수 없음을 알아 광야와 골방에서 우리를 주님의 말씀과 지혜로 무장시키시며 온전케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언16:9)이심을 알아 성령과 겸손히 동행하는 도시의 삶이기를 소망한다.&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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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사도행전3장(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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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3-22T16:29:30P</published>
      <updated>2011-03-22T16:29:30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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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tartFragme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3장(2)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0년을 주저앉아 살았던 한 남자가 어느날 문득 일어났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근육하나 제대로 없어 야윈 다리로 후덜덜 거리며 겨우 일어서서 물리치료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의사 누가도 이점을 주목하고 있다. ‘곧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니 일반 상식으로 보더라도 40년을 사용하지 않은 다리가 곧 일어서서 그것도 걷고 뛸수있을까? 다리가 골절되거나 인대가 늘어나서 한동안 깁스를 해본 이들은 당장 의아해할 것이다. 겨우 몇 달 깁스를 했을뿐인데 다리는 홀쭉해졌고, 한동안 제대로 걷는 것이 영 불편해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다리 근육을 키워 가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임을 알고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니까 3장의 40년 된 앉은뱅이 기사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기적은 두 가지 정황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그가 일어섰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것도 일어나자마자 즉각적으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걷고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마치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서 천장을 뜯어 달아내린후에 그가 나음을 얻어 자기의 침상을 들고 나간 기사와 흡사 비슷하다. (마 9:1-8; 막 2:1-12; 눅 5:17~26)&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두가지 흡사한 기적 기사에서 중요한 단서는 그 사건의 파장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께서 달아내리운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셨다(눅5:20).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한다.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주님께서 이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니 그가 자기 침상을 들고 나갔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의 질문(네 죄가 사해졌다 vs 일어나 걸어가라) 중 무슨 말이 실상 더 쉬운 말인가?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당연히 네 죄가 사해졌다는 말이 쉽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즉, 하나님 만이 보시고 판단하실 수 있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언을 어떻게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욕하면 그만이고 무시하면 될이고 혹은 심하다싶으면 신성목독으로 공회에 넘겨 몇 대 늘씬 패주는 것으로 속을 달랠 사안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정작 그 현장에서 어려운 것은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가라’는 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말했는데 못일어나면 어쩔것인가? 그럴 경우가 99.99%이기 때문이다. 말뿐으로 그칠 공산이 너무나 크다. 말잔치로 끝나버리면 그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것이고 그간 공들였던 복음사역이 물거품이되어 다 떠나갈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더욱이 이 중풍병자와 앉은뱅이 그리고 나면서 소경된 사람과 문둥병 환자들의 공통된 정서는 저주였다. 즉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람,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은 사람, 죄의 속박에 메인 고달픈 인생이라는 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 사람이 일어나거나 보고 그리고 깨끗해진다면 즉각적으로 이해되기는,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와 죄에서 놓임 받았구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어려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사람이 죄용서 받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또한 이 기적 기사들 가운데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즉각성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침상에 누웠었는지 알수없지만, 적지 않은 세월을 누워 지냈고 그간 고치기 위해 나름 열심의 세월이었음을 그 친구들의 열정에서 엿볼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즉각적인 고침과 힘을 얻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예수의 권세가 가진 특징이며, 이 사역이 지속적인 생명의 역사임을 고지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의 설교는 바로 이점의 강조에서부터 시작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2&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즉, 이 사건이 가져온 파장이 단순히 40년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어 걷게 된 신기한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저주받았다고 생각했고, 저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 어느 누구도 성전에 들여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입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 강력한 생각이 도전받아 산산조각 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누구나가 자신의 확신이나 그동안 자신의 지탱했던 사상이나 신념이 무너졌을때의 그 황당함과 무안함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내 목숨을 걸고 미래를 걸었던 확신이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현실을 부정하거나 하는 이상증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벌어진 문제를 받아들이는데 몇가지 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를 가지고 점차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습에서 얼마나 그 충격이 심각하게 우리들에게 작용하는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40년된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에서 걷고 뛰어다니며 찬양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 특히 그 사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10절)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행각 근처에서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지목하여 붙잡고 감사를 표하며 이분들이 나를 낫게하신 분들이라고 소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며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도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남자가 걸을수있게 되었다는 것보다, 이 남자에게 실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궁금하고 속시원한 설명이 절실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러한 모습에서 앞서도 설명했지만, 성령충만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이처럼 예수를 소개하며 복음의 역사를 열어가는 성령 역사의 한 축으로써의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오순절날 성전 마당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의 역사로써의 성령충만이나, 베드로와 요한의 영적인 눈을 열어 비전의 사람 변모시키는 성령충만의 역사는 이처럼 복음을 확장시키며 예수를 만나게하는 접촉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는 백성들에게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마치 이 일이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 때문에 일으로 믿고 싶어함이 어찜이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하고 관심어린 자신들에 대한 시선을 교정한다. 마치 앞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궁금해 하던 디아스포라들에게 ‘지금이 오전9시이므로 우리가 술취한 것이 아니다’ 하던것과 같이 관심을 증폭시킨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리고 4장 2절에서 보고되는 바와 같이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즉각적으로 변경하며 적용하는 심판의 주로 오셨다는 것에 대함이다. 많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오시고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의 역사 가운데, 생명의 역사와 우리의 악함을 버리게 하시는 역사로 함께 하심을 지적한다. 즉 40년 앉은뱅이처럼 하나님과 실로 관계없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만의 온전함과 열심 그리고 차별을 통한 선민의식의 완악함에서 박차고 나와서, 예수의 믿음 역사 가운데로 진입함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약속된 복에 동참한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40년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어 걷고 뛰어다니며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복은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믿음의 결과이지, 우리가 특별하거나 더 경건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망 만이 이런 완전한 나음의 역사가 있다는 데모인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께서 천장을 뜯어 내리워진 중풍병자에게 죄용서와 병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은혜를 부으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걷어올 수 없고 헤험쳐올수없으며 기어올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대신해서 예수의 믿음만을 붙잡고 믿음의 역사를 결행한 그들의 믿음에 반응하신다. 마치 40년 앉은뱅이는 아직 채 예수를 향한 믿음 그 조각마저 없었다하더라도, 그 상황을 보고 읽어내며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그 아이러니한 상황을 고치고자하는 열망을 가진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의 역사를 허락하심을 주의깊게 바라봐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충만의 역사는 바로 이처럼, 나를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시며 적용해가는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님의 역사를 헤아릴수있게 하시며 내 자신의 축복의 통로로써 온전히 내어드림으로 말미암아 예수 생명의 역사에 동참함이 성령충만의 감격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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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사도행전 3장(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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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3-18T13:55:42P</published>
      <updated>2011-03-18T13:56:05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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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3장 1~10절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에서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한 남자가 일어나서 뛰었다는 기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적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바로 달은 보지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경우이다. 본문의 기적도 의미있고 엄청난 사건이지만, 앞서 오순절 방언의 예처럼 방언 그 자체가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그 닫힌 상황을 열어주는 접촉점으로써의 역할과 같이, 성령께서 어떠한 역사의 물꼬를 열거나 방향을 바꾸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기적행전이 아닌 성령행전인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태어나면서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앉아지낸지가 근 40년 세월인 한 남자가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지금은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간병인도 있고 그리고 심지어 휠체어를 이용하여 달리기나 농구를 하기도 하는 세상이지만, 당시엔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육체노동으로 모든 사회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그가 철들어 하는 일은 누군가 성전 문에 자신을 옮겨다놓으면 신앙 좋거나 그날의 기분이 좋은 사람들의 푼돈에 기대어 연명하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더럽고 아니꼽다고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그저 습관적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내밀어 동냥을 구함이 당연하였다. 그날도 어제와 그리고 까마득한 전날과 동일한 일상이었다. 성전에 드나드는 눈익은 사람들에게 선처를 호소하며 한푼을 구한다. 하루에 보통 서너번은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겹도록 보노라면 어느정도 눈에 익고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할 정도였을 것이다. 돈 잘주는 사람, 돈 잘줄 것 같은 용모나 행동 등에 대해서는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2~30년 세월을 한결같이 성전 미문을 지키고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루살렘에서 생활한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거처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미문 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세 번의 기도시간을 베드로와 요한도 성실하게 지키며 기도하러 다녔다면 벌써 미문 쪽에 풀죽어 습관적으로 구걸하는 이 남자를 수차례 보기도 하였고 돈도 얼마간 주었을 수도 있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도 진정으로 이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 그저 당연한 풍경이려니 하며 기도하러 성전에 드나들었다. 그날도 앉은뱅이는 그 사람대로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였을 것이고, 베드로와 요한도 여느때와 별다를바 없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익숙한 거리 풍경이었지만, 그날따라 뭔가 다르게 보였다. 성전 미문에 앉아 처량하게 구걸하는 40세된 남자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고, 전날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도할 시간이 촉박하니 그저 훅하고 바삐 걸음을 재촉할 순간이었지만,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의 눈을 여시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늘, 단지 다리가 불편하고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전 입구에서만 맴돌고 살아가는 현실이 문제있고, 왜 그동안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살았는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저주 받은 것 같았고 그저 타고난 운명이려니 해서, 더 이상 그 어떤 변화나 소망마저 끊어져 버린 진정 아리러니한 상황이 읽혀지는 것이다. 그저 사람 많이 다니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한평생을 성전을 코앞에 두고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아니 들어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한 남자의 주저앉음이 헤아려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저 문을 넘어서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은총의 공간이라 누구나가 생각하고 기도하면서도, 이 남자 스스로나 그 가족 혹은 지인들 아무라도 그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음이 놀라웠다. 그저 주인의 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줍고자하는 어떤 이방여인처럼 울며 낙심하며 부스러기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그 남자를 예수의 눈으로 발견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이제 볼수있게 된 비전의 사람, 영적 소경이나 다를바없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게하신 성령의 채우심이, 오늘 그들에게 임한 성령 충만의 역사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육체적인 소경이든 영적 소경이든 보지 못하면 다가설수도 이해할수도 없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멸망의 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영적 소경임을 안타까워하시며 지적하시던 예수의 말씀이 베드로와 요한을 눈뜨게 함이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며 깨닫게하시며 보게하시는 은총의 역사, 성령 충만의 은혜를 사모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내 삶의 자리에서나 교회 공동체, 작금의 사회 현실 가운데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두 번째 성령충만! 그것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성령 충만이다. 나혼자 잘나서 잘먹고 거들먹 거리며 영적 소경처럼 좌우를 둘러보지 못하고 사랑해야 할 형제와 자매를 거두며 돕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하등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주님과 상관없이 제 멋에 살다 가는 일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내가 맞닥뜨리고 살아가는 삶의 정황에서 습관이나 게으름 혹은 사탄의 책략으로 말미암아 깊이 가리워진 영적 실체와 영적 소경 상황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현실들 앞에... 눈을 열어 비전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임하기를 사모한다. 요한복음 9장 초반에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두고 누구 죄 때문에 이런 험악한 꼴을 당했는가 분석하고 헤아리는 영적 소경과도 같은 제자들을 두고, 주님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막7:34)&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에바다...&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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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순절에 임한 성령 충만 ; 태어난 곳의 방언 - 사도행전2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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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3-18T00:31:41P</published>
      <updated>2011-03-18T00:36:28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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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채덕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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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오순절에 임한 성령 충만 ; 태어난 곳의 방언 - 사도행전2장(1)&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2장부터 성령충만의 여러 양상이 소개되며 하나님의 역사를 메워간다. 마치 믿음의 교과서라할 수 있는 히브리서 첫부분에 표현된것처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도 같이, 성령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어떻게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지고 나누어지는가에 집중한다. 가히 성령행전이라 불릴만큼 성령 충만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사역의 향연이 이어진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의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는 다소 편협하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천편일률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가 제한적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과 경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하고 만난 성령 충만이 전부인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가장 중하다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지 않음을 애써 인정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성령 충만이 귀하여 나를 살게 했다면, 다양한 모습의 또다른 성령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이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는 동참하기 때문일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은 이처럼 다양한 성령 충만의 중요한 국면을 소개하며 도전한다. 각각이 소중하며 사모할만하다. 내 삶의 자리에서 꼭 있어야만 할것같은 귀한 성령의 채우심이 우리를 붙들기를 소망함으로 첫 번째 성령충만을 이야기하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은 오순절 날이 이르러 제자들과 다락방에 기도하던 120여명 사람들이 성전에 옹기종기 모였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각양 다양한 나라와 지방에서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로 가득하였다. 시끄러웠을 것이다. 다들 안부를 묻기도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암송하며 절기를 분주히 보내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이 임하셨다. 임하신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고 나누어져야만 했다. 그 사람들은 얼마전 있었던 갈릴리 지방의 젊은 청년의 십자가 처형을 어렴풋하게 소식을 접했을 것이지만 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시끄러운 야외지만 다양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표현하며 집중시킬 방법이 무엇일까? 성령께서 그들의 입을 열어 경건한 유대인들의 각 출발지이며 그들이 태어난 나라의 방언들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도하게 하셨다. 갈릴리 촌사람, 관심을 집중시킬 아무런 방편이 없었던 그들에게로 한순간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진다. 갈릴리 사투리로 그저 한편을 시끄럽게 자리잡아 떠들든 별관심없었던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고향 방언이 유려한 언어로 터져나오자 놀라워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무슨일인가싶어 관심을 집중하며 이 이상한 사태를 파악하고자 모여든다. 알고자 다가서면 설수록 더 이상하다. 촌사람, 행색만 봐도 별 볼일없어 보이는 그들이 적어도 10가지 이상의 외국어로 각 사람이 떠들고 있다. 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모국어를 외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뭐가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것인가! 큰일이 일어났다는데 뭔일이라는 것일까? 놀랍고 궁금하다. 혹시 이들이 술취하는 것은 아닌가싶어 냄새도 맡아보고 관찰해봐도 도무지 알수가 없다. 당황스럽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때 베드로가 모여든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소리를 높여 설교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조금전 다락방에서 맛디아를 뽑을 때 하던 설교와는 격이 다르고 질이 다른 성령의 감동과 조명을 받은 메시지를 힘있게 외친다. 첫 도입부터 정곡을 찌른다. ‘때가 제 삼시니 취한 것이 아니라.’ 즉, 아침 9시에 누가 술에 취했겠느냐 어제밤에 취했어도 지금은 깰때지 않냐 정신 말짱하다. 여러분 중에 술 취했다는 오해와 조롱은 말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며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어서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가 하나님의 큰일임을 권하며 확증한다. 그날에 삼천명의 사람이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본문은 보고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에서 보여지는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의 은혜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후에 바울도 설명하고 본문에서도 보여지는것처럼, 방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방언을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는 수단으로써 방언외에 다른 것일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의 관심과 기회를 얻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 방언이었던 것이지, 방언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이거나 유일한 은사이기 때문에 사용되고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의 상황, 나의 처한 형편 가운데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은사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충만의 첫 단계이며 우리 믿음 생활의 가장 기본인 것이다. 그것이 방언일수도 있고, 때론 병고침의 은사이거나 가르치는 은사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방언은 개인적인 은사라고 바울은 지적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개인의 기도시간에 골방에서 혼자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방언의 은사가 활용될수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 충만한 역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이 기도하는 자리거나 방언이 정녕 필요한 역사의 상황에서는 제대로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자.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변에서 많은 방언을 듣기도하고, 가끔씩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의미있는 방언을 접하기는 어렵다. 본문의 베드로와 120여 성도들이 다양한 외국어로 분명한 하나님의 큰일을 담아내듯이, 영어나 불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방언하는 경우를 접하지 못했다. 대개 알지못할 몇음절의 반복어구만으로 시끄러울 따름이었다. 소망한다. 정말 필요할 때, 일본사람을 위하여 일본어 방언이 내 입의 열매로 고백되는 성령충만이 임하기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정리하면, 오순절 방언의 모습으로 드러난 성령충만은 방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형편에 가장 알맞은 은사로 채우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핵심이다. 잠언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음같이, 경우에 합당한 성령의 은사가 이른비와 늦은비 같이 우리네 삶에 채워지기를... 이러한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깊이 기대한다.&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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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사도행전 1장(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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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1-03-17T16:59:22P</published>
      <updated>2011-03-17T17:01:21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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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1장(4) -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1장의 마지막 보고는 베드로의 제안으로 제비뽑아 맛디아를 유다 대신에 사도로 세움으로 12명의 사도를 회복함에 대한 기사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겉으로 드러나는 120명 회중의 기도회와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이어지는 제비뽑는 일련의 과정은 은혜롭다. 그러나 마냥 은혜롭기만 하지 않음에 대해 본문은 집중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 이유의 첫째는 세워진 맛디아의 행적이나 이후의 보고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목할만한 사건이며, 의미있는 결정이지만 인간적이었음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드러낸다. 오히려 이후에 주께서 세우시는 진정한 12번째 사도인 바울의 등장에 오히려 이 결정이 어떻게 두고두고 방해가 되었는가에 방점이 찍혀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맛디아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사도들은 배척하고 의심하였지만, 주께서 세운 진정한 12번째 사도인 바울의 사역으로 점차 초점이 맞추어진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둘째는 베드로의 설교가 과연 적절한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풀어내었는가하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적절치 않았음에 무게가 실린다. 어찌보면 베드로의 설교는 다소 낯간지러운 설교이기도 하다. 유다의 죄악과 역할에 대한 해석이 어쩌면 이렇게 성급하게 다루어지고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는가하는 것이다. 이곳에 모인 120명의 회중 중에서 십자가 밑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이들이 과연 몇 명이었는가? 몇 명을 제하고는 다들 도망하고 의심하고 저주하고 황망해했지 않았는가!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마저 주님의 만남의 약속을 또다시 잊어버리고 동료들을 부추겨서 고기잡는 어부로 신속히 돌아섰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명을 재충전하시고 다시금 40일동안 그들을 만나시며 회복하셨다하지만, 여전히 조금전의 실수와 부끄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의 상황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무엇보다도 베드로와 그들은 ‘기다리라’는 명령 가운데 기도하는 중이었다. 성경에서 기다림의 영성을 때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기다리지 못하고 무언가 일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과 그들의 결핍에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다리며 주님의 채우심을 바라고 소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동료들에게 고기잡으러 가자고 제안하는 것처럼, 120명의 회중들에게 제안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상황 판단과 말씀 인용 그리고 명확한 기준을 가진 대안을 제시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유다는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말씀에 그의 거처를 황폐케함과 그의 직분을 대신할 타인 세움을 말씀하셨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한의 세례부터 승천날까지 주 예수와 함께하며 우리와 출입했던 자들 중에서 세우자.&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간략하게 정리하면, 유다에 대한 상황 판단이 너무 매정하며 책임전가의 분위기가 있다. 또한 그의 말씀 인용의 건전성이 떨어지며 사도의 후보 기준이 너무나 인간적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셋째는 제비뽑기를 통한 사도 세움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시대에 과연 적절한 하나님의 방법 찾기의 대안이 되는가하는 점이다. 제비뽑기는 선택의 결과가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신앙 표현의 한 방법이지만, 성령을 기다리며 그의 사역에 동참해야하는 사도들에게는 낯간지러운 차선책이다. 성령께서 기가 막혀 웃었지 싶다. 너무나 인간적이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새 피조물답지 않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지만 이러한 2% 부족한 제자들의 일련의 사역들이 마냥 부정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협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성령과 동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일을 망쳤을 때의 연약함마저도 주님께서는 사용하시며 새롭게 하심이 어찌보면 소망의 또다른 측면이기도 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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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사도행전1장(3)</title>
      <id>http://kyfamily.org/zbxe/38685</id>
      <published>2011-03-16T11:00:53P</published>
      <updated>2011-03-16T17:25:00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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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6 저희가 모였을 때에&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tartFragme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본문에서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을 짚고 넘어서야 한다. 왜냐면 이 부분을 헤아림이 사도행전 전체를 보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후, 열흘이라는 기간에 대한 이해이다. 달리 말하면, 주님의 승천과 더불어 주어진 명령(4~5절)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다보면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 이라는 당부에 대한 헤아림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 본문에서 빚어지는 오해가 무엇인가하면, 바로 “하나님의 부재”라는 것이다. 즉 주님,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더 이상 계시지 않음으로 볼수가 없고, 성령 하나님도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특별한 경험이 있기까지는 아직 우리에게 임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텅빈 부재의 기간은 상상하지 못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렇다고 생각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저 제자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렸잖아? 기특하게도... 예수님도 기다려라 하셨기에 기다린것이지... 뭐 특별한 일 아니잖아! 라는 식이다. 그리고는 바로 오순절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가운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같은 임재의 방식으로 성령이 임하셨음에 주의를 옮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의 기다림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문제될 것 없이 지나갈 것 같아 보이는 부분이지만, 실상 이런 무심함에서 빚어지는 문제점은 크고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한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 세례 그리고 충만의 개념이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이 혼돈은 성령과의 동행이라는 우리네 믿음생활에 있어 몇가지 중요한 여파를 가져온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첫째는 성령 임재에 대한 혼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둘째는 성령 충만에 대한 혼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셋째는 성령 받았다 혹은 성령 충만의 양상에 대한 오해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첫 번째 혼란은 성령의 임재에 대한 오해와 그로인한 불필요하고도 과도한 종교행위에 대한 집착들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의 임재는 끊임이 없다. 열흘이라는 기간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에서 빚어지는 혼란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세계에 대한 방치 혹은 부재는 불가능하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조의 고백에서 보여주듯, 성령의 역사는 크게 세부분이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생)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신경에서 성령의 역사를 고백한후에 유일하게 ‘아멘’으로 화답하며 우리네 삶에서 애씀으로 성령과의 교통/동행을 고백하는 것은 늘 현재 진행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의 역사는 감사함으로 받을 항목들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아멘으로 애쓰고 동의하며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믿음의 역사라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성령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아브라함때나 예수의 성육신의 사역중에서나 그리고 지금 우리네 삶에 있어서 언제나 늘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할수있도록 돕는다. 아멘의 반응이 성령의 역사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방문하셨을 때, 깊이 한숨쉬며 내뱉은 한마디! - 성령을 받으라(요 20:22).&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은 도망함으로 숨어있는 제자들을 용서하시며 평안을 안부하며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요청하시며 덧붙이신 한마디... 성령 받으라! 오직 성령께서 분노할 수밖에 없고 맘이 상하여 낙심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육신이신 예수님을 세우시며 끝까지 낙심치않고 소망을 품게 하심도 성령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은 그동안 꽁꽁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주님의 승천과 더불어 짠하고 무대에 등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이미 함께 늘 일하심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께서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 하심은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의 임재를 소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성령의 충만한 사역 가운데 동참하는 아멘의 삶으로 초대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성령의 임재와 성령 세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고 분리되어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의 임재가 성령 세례의 어떤 양상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 여부가 확신되거나 좌절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 한시도 떠나지 않겠다 약속하셨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둘째로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에 대한 혼란상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의 임재 가운데 때로 하나님의 필요와 역사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어떤 악세사리나 신앙의 어떤 레벨이 올라감으로 좀더 강력한 주님의 종이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이런 오해 때문에 사람이 교만해지기도 하고, 영적 열등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않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위해 연약한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이다. 이것은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채우심이다. 그러므로 자랑할것이 아니라, 사명감으로 잘 간직하여 지혜로운 청지기로서의 과업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시대의 과업처럼 다소 거창 할 수도 있고, 처한 상황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주어지는 다소 단촐한 그러나 중요한 과업일수도 있다. 주어진 삶의 자리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위에서부터의 성령 충만을 사모함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대로 섬기는 것 - 이러한 믿음의 삶에는 그 어떤 교만도 자랑도 자리하지 않는다. 단지 지혜롭고 성실한 청지기의 수고와 헌신이 있을 따름이다. 그들의 고백은 할 일을 했음에 대한 겸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바쁨만이 가득할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셋째 혼란상은 성령 충만, 성령 세례의 여러 양상에 대한 혼란 혹은 오해에 관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사실 이 부분이 앞으로의 사도행전 공부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정리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무속신앙에서 흔히 나타나는 종교적 흥분 또는 감정적 공감 같은 것으로 많이 오해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집회나 흔히 성령받았다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굳이 표현하면 섬뜩함이다. 무섭다. 심지어 광기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뭔가 한가닥한다는 이들의 공통점으로 무례하다. 자아도취적이어서 타인의 공감과 이해를 구하기 힘들다. 자기들만의 신비적 체험에 가치와 위엄을 둠으로 타인과 차별을 두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경향이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자인것처럼, 축복의 매개자인것처럼 타인의 삶을 조정하려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의 충만함과 상관없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마치 산상설교의 마지막 열매비유나 종말설교의 종말 심판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분명하게 언급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이런저런 큰일과 놀라운 권능을 행하였고, 내가 언제 주님을 섬기지 않았나요 최선을 다한 멋진 섬김을 살았노라 자부하며 소리치는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세례(성령충만)는 위에서 표현한 것과 엄연히 다르다. 양상도 다르고 열매도 구분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 말씀하신다. 열매를 판단하시리라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시대가 다르고 처지가 다름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습과 양상은 다르지만,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span&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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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염없는 기다림 - 사도행전1장(2)</title>
      <id>http://kyfamily.org/zbxe/31852</id>
      <published>2010-01-17T22:41:50P</published>
      <updated>2010-11-16T20:12:35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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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tartFragmen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행전 1장은 기다리라는 명령 가운데 온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일을&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 저질러버린 연약함의 보고로 시작된다.&amp;nbsp;&amp;nbsp; 그런데 사실상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amp;nbsp;사도행전을 믿음의 경전으로 삼고 따라가는&amp;nbsp;우리에게는 위로가 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흡사 남&amp;nbsp;잘되면 배 아프고 실수하면 고소해하는 소인배 심보 같지만, 실상이 그렇다.&amp;nbsp; 만약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의 첫 시작부터 거의 완벽한 주님의 12제자들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만 채워지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또 한명의 제자로서 기가 팍 죽었지 싶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amp;nbsp;실상 경건과는 거리가 있고,&amp;nbsp;완벽하고 멋진 믿음의 여정은 타인의 어느 멋진 간증 속의 이야기이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듯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이기에 그렇게 느낄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들의 야무지고 멋진 영성을 닮아가야지 하는 굳은 결의보다는 &apos;쟤들이니깐 저렇게 살지...&apos;하는 넋두리와 의지박약의 현실 앞에 고개를 폭 숙였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행(?)하게도&amp;nbsp;사도행전의 시작은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연약함과 실수&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찔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깨닫지 못하는&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 천연덕스러움이 있어 감사하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예수 충만’은 실제적으로 나와는 관련이 없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가지 않는 이상, 주님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성령 충만’은 12제자 이후로 모든 예수 제자들의 공통 관심사이며, 주님의 선물이기에 민감해야만 하는 믿음의 아킬레스건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 충만이 예수 충만한 12명의 사도와 몇몇 탁월한 어떤 개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도 시대후, 모든 믿는 자들의 관심이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와 추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 믿음의 주제이며 이야기꺼리여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나 상당수의 믿는 자들이 너무나 탁월해보이고 때론 특별하기만 한 성령 충만의 설교와 현상들 앞에 너무 기가 죽어버려 관심이 없거나, 때론 중요하긴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믿음의 고수들만의 전유물로 여기거나 혹은 영적인 로망으로써의 성령충만으로 받아들임으로 수련회나 부흥회 또는 기도원 같은 곳에서 6개월 혹은 3개월정도의 약발을 기대하며 은혜의 부스러기를 담는 정도로 여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충만을 너무나 많이 듣고 간절히 사모하지만, 어느샌가 이러한 제한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정도의 은혜가 나에게 맞는 성령충만이고, 이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이고 이 이상의 성령충만은 사치라고 여기면서 적당한 성령충만을 추구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도행전 1장은 새로운 관심을 열어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pos;어라! 예수충만(예수님과의 3년간의 동거동락)을 경험하고 살아갔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집사들도 나랑 비슷하군! ... 나만큼 실수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구나! ... 나만 그런것이 아니군! ... 이런 사람들이 성령충만의 주역들이라면, 나도 희망이 있겠구나...&amp;nbsp;성령충만이 그렇게 어렵고 이상한것이 아니라&amp;nbsp;부족한 내 삶을 풍성케하는 믿음이구나... 기도원이나 교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믿음의 길이구나...&apos;&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1. 기다려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amp;nbsp;&amp;nbsp;&amp;nbsp;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amp;nbsp;&amp;nbsp;&amp;nbsp;&amp;nbsp;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일 동안, 제자들은 당혹감 가운데 부활을 이해하기 바빴을 것이다.&amp;nbsp;&amp;nbsp;예수님의 많은 증거들 앞에 마음을 추스르며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amp;nbsp; 어쩌면 3년 동안 주목한 것보다 더 열심을 기울여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을 것이다. 이 시간은 그간 주님을 따라 다니며 듣고 접했던 말씀과 이적들 그리고 현실의 이해되지 않았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기회였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공생애를 준비하셨던 그 열정으로,&amp;nbsp;지상에서의 마지막 40일을 채워나가셨을 것이다. 그런후에 마지막 유언처럼 명령하신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pos;예루살렘을 떠나지&amp;nbsp;마라.&amp;nbsp;&amp;nbsp;&amp;nbsp;내가&amp;nbsp;강조하며 가르친것을 명심해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amp;nbsp;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이다.&apos;&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것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같은 기다림의 당부이다. 왜 기다리게 하셨을까?&amp;nbsp; &apos;몇날이&amp;nbsp;못되어&apos;라는 단서로 보아 그렇게&amp;nbsp;길지않은 시간임을 말씀하시지만, 어쨌던 &amp;nbsp;짧지만 분명치 않은 기다림!&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실상, 성경에서 기다림은 매우 중요한 영성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apos;기다림&apos;은 고비마다 빛을 발한다. 기다리지 못할 만큼 유혹적이고,&amp;nbsp;조금 더 기다리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어떤 열매를 맺거나 혹은 순종치못함으로 아쉽거나 참담한 결말을 빚기도 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아브라함은 소망이&amp;nbsp;끊어지고 약속이 희미해지고 닳아 없어진듯한 순간까지 기다려라했었다. 모세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다듬어지기까지 이해되지 않는 긴긴시간을 버티다고 포기할정도로 내버려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다윗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 무심하고 잔인한 세월 속에서 능력을 오히려 키워가야 했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제자들도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자신들을 로마의 무력과 동포들의 분노, 진실로 무슨 일이 어떻게 기약없이 닥칠지 모르는 현실 가운데 별다른 대책없이 기다릴것을 명령받았다.&amp;nbsp; 믿음의 선진들이 명령을 받아서 작심하고 기다리던지, 아니면 얼떨결에 기다리던 간에 하염없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정체된&amp;nbsp;삶을 견디어&amp;nbsp;내야하는 기다림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기다림을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기다렸는가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amp;nbsp;약속으로 주어지고 있는 가를 주목해야 한다.&amp;nbsp;아브라함에게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은 민족을 시작케하실것에 대한 약속이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회복과 소망에 대한 약속처럼,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apos;요한의 물세례와 비교되는 성령 세례&apos;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모든 기다림은 약속이 있어 의미가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불안하고 당장이라도 도망하여 거처를 옮기고 싶은 보호본능에 맞서서 위험을 고스란히 견디고 불안한 현장 가운데 머무는 것은 그만큼의 가치있는 보상과 의미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 약속은 비교대상이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pos;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amp;nbsp; 세례를 받을 것!&apos;&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요한의 물세례’와 비교되는 예수의 성령 세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므로 먼저 요한의 물세례의 의미가 헤아려져야 한다. 요한의 물세례가 희미하면 예수님의 성령 세례도 희미해지고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한의 세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영적 형편을 헤아림에서 시작해야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한의 메시지가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면모가 큰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실상 더 큰 관심은 오랫동안 선지자의 부재로 말미암아 낙심하며 심음하던 상황 가운데 등장한&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람-선지자라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놀러나간 아이가 오랫동안&amp;nbsp;행방을 모르고 늦도록 들어오지 않으면, 온갖 걱정 가운데 하염없이 마음을 졸이다가 늦게라도 흙투성이라도 멀리 보이기만 하면 그저 얼싸안고 볼을 부비는 것이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인 것처럼, 요한은 학수고대하다 마침내 만난 그 사람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마지막 선지자가 이후,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amp;nbsp; 그 몇 세대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선지자다운 선지자를&amp;nbsp;&amp;nbsp;만나지 못했었다. 그저 부모들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들의 실제 삶은 하나님 부재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기실 400년 세월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한다.&amp;nbsp; 기껏 100년 세월도 못사는 주제에 곱절의 곱절의 기다림과 아픔을 담아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요한의 세례 운동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선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관심을 끌기에 일단 유리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일단은 ‘하나님의 오심, 보내심’의 현실 앞에 감격하고 감사했을 것이다.&amp;nbsp;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듣던 하나님이 드디어 자신의 백성들에게&amp;nbsp;다가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어떤 내용을 담고 왔는가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우선은 감격하고 울고 볼일이다. 정신없이 매만지고 쳐다보고&amp;nbsp;뺨을 부비는 것만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음만이 눈에 들어오지, 그가 어디서 어떻게 무얼하며 살았는지 혹은&amp;nbsp;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하는 것은 후에 돌아볼 일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여 서릿발같은 매서운 음성에도 꾸역꾸역 몰려들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집중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의 운동은 다소 뜻밖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한 자신은 다만 오실이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뿐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오실분의 신발끈도 매듭풀지 못할만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선지자로서의 요한의 큰 사역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소 실망이 일어나기도 했을터지만, 이내 더 큰 분에 대한 기대와 메시지에 기대하면서 더더욱 요한의 메시지와 세례운동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주님의 길을 예비함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요한의 사역은 세례운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마디로 요한의 세례 운동은 영적 파격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단지 요단강에 나아와 하나님의 보내신 이 앞에서 세례만 스스로 행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amp;nbsp; 당시엔 요한이 직접 세례를 시행한 것이 아니라, 요한은&amp;nbsp;앞에 섰고 나아온 사람이 스스로 침례를 행하는 방식이었다.&amp;nbsp; 보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작은 결단과 움직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amp;nbsp;낸다는 요한의 운동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감격했고, 어떤 이들은 분노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실상 앞서서 어떤 선지자 같은 이들이나 몇몇 거룩한 공동체에서 이미 세례 운동이 있었다.&amp;nbsp;&amp;nbsp;그들은 거룩했고 간절했다. 세례운동은 율법의 방법이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더이상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절박한 자신들의 한계와 냉철한 현실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남았음을 고백하고 소망하는 표현이 세례운동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실상 세례(침례)는 나의 방법을 포기하는 것. 하나님께만 방법과 살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며 나 자신을 버리는 것, 나를 부정하는 행위, 오직 하나님께 드림으로 다시 살 것을 소망하는 표현방식으로 점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더이상 나의 것, 나의 방식, 나의 목숨으로는&amp;nbsp;아무것도 변화시킬수없음을 고백하는 삶의 정황에서 나오는&amp;nbsp;영적 몸부림이 세례 운동이었던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세례 운동은 그들의 거룩한 삶 가운데 맺힌 열매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기다림은 때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치닫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은 하나님 만을&amp;nbsp;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방법 만이 나를 살리고, 하나님의 손길만이 나의 상황을 변화시킴을 뼛속까지 고백하는 열매를 맺는다.&amp;nbsp;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인 온갖 방법들과&amp;nbsp;별별 시도, 마지막 최후의 수까지 다 동원했지만, 그냥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연약한&amp;nbsp;상황들을 마주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뭐가 있겠는가!&amp;nbsp;&amp;nbsp; 그저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며 거룩해 지는 것 뿐!&amp;nbsp; 모세처럼 늙고 지치고 머리가 텅비어 백짓장처럼 연약해짐으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해지거나, 다윗처럼 욕먹고도 울컥하는 마음을 배설하지 않고 도리어 묵묵히 참아냄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신 나서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경지까지 다듬어지는 것!&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뭐 달리&amp;nbsp;선택할 것이 없는 막막한 현실 가운데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한는 것과 결국 하나님만이 이 현실의 사태를 바꾸어 가실 유일한 대안으로 고백함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세례의 공동체로 버티는 것!&amp;nbsp; 이 두가지외에 기실 별다른 길이 없다.&amp;nbsp; 이러나 저러나 별 다를바 없는 내 삶에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실것을 바라며 점점 더 거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삶!&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요한의 세례는 이와 같이 비참한 현실, 변할것 같지 않은 세상,&amp;nbsp;로마의 무력앞에 속수무책인 조국의 암담한 시대 가운데 빚어진 거룩한 영적 몸부림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apos;어쩔수없는 암담한 현실 앞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해서, 죽기살기로 우쨌든동 하나님 만이 우리의 살길이다싶어&amp;nbsp;거룩한 삶을 작정했고, 그 작정한 믿음의 결단이 더이상 나에게서 우리에게서는 나올수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올수있음을 고백하는 의식 또는 운동으로써의 세례가 전혀 헛다리짚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하나님의 선지자,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신&amp;nbsp;하나님의 사람도 세례 운동에 동참하더라는 것이다. 그저 달리 길이 없어서 죽고 포기하기엔 아쉽고 뭐해서 한가닥 소망으로 기약없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조상의 하나님을 바라고 살자싶은 마음으로 믿음 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셈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 방법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천명하셨다는 사실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이점이 놀라웠다.&amp;nbsp; 유대인들도 이미 내가&amp;nbsp;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서는, 거듭나지 않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amp;nbsp;은연중에&amp;nbsp;고백하고 있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정말이지 때가 찼다.&amp;nbsp; 억지로 하나님께서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봤자 별 실속이 없었을터인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달리 설명치 않아도 내 믿음의 삶에서, 내&amp;nbsp;답답한 현실의 삶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때가 찼고 주님의 오실 준비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amp;nbsp;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gt;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바로 이런 점에서 주님의 길을 온전하게 준비하고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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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 사도행전 1장(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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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9-12-05T21:14:17P</published>
      <updated>2009-12-06T16:01:41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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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성령충만이 뭘까?&lt;/p&gt;
&lt;p&gt;과연&amp;nbsp;어릴적부터 교회를 출입하는 동안 경험했던 이런저런&amp;nbsp;일들 중 몇몇 경우가&amp;nbsp;진짜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재한 경우였을까?&amp;nbsp; 늘 궁금하다.&lt;/p&gt;
&lt;p&gt;주변엔 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령 체험 혹은 성령 충만한&amp;nbsp;이들을&amp;nbsp;많이 보아왔었다.&amp;nbsp;기도원이나 여러 집회중에 그들이 보인 모습이나 평소에 하는 말투 등을 종합해보면 뭔가 신령스러워보였고 꽤나 있어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상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별반 다를바 없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성령충만을 깊이 경험한 사람 치고는&amp;nbsp;문제가 오히려 더 심각하거나 너무나 비상식적인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amp;nbsp;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럴때마다 생각하며 고민한다.&amp;nbsp; 성령님께서 그저 스리슬쩍 다녀가신것도 아니고, 충만해서 넘친다고 하는 이들의 삶이 오히려 더많은 분열과 아집 그리고 황당한 모습앞에... &apos;과연 성령 충만하기는 한것인가?&amp;nbsp; 경험하고 누린다고 하는 성령충만의 실체가 혹시 잘못 이해되거나 느껴진것은 아닐까?&apos; 싶은 우려가 그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정말이지 한국 교회 만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 고백하며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땅에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amp;nbsp; 장로와 권사 그리고 집사들 중에 공석에서 난 성령 희박자&apos;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amp;nbsp; 체면 때문이라도 앞에서는 거룩한 척,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amp;nbsp; 그렇지만 사석에서는 경우가 다르다.&amp;nbsp;&amp;nbsp;식사나 술자리에서의 진실한 자기 연민과 고백은 &apos;오호라 나는 곤고한 성령 무관자 혹은 성령 희박자다&apos;라는 이런 푸념들이 실상 많이 터져나온다. &lt;/p&gt;
&lt;p&gt;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마다 집회마다 성령충만은&amp;nbsp;단골소재이며 추구하며 &apos;아멘&apos;&amp;nbsp;크게 화답하는&amp;nbsp;어떤 영적 로망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래서인지 자칭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싶다.&amp;nbsp; 어떤 용하다는 점쟁이나 무당들처럼, 곳곳에 성령충만한 어떤 장로, 목사, 권사들이 주변엔&amp;nbsp;많다.&amp;nbsp; 궁금하다.&amp;nbsp; 이렇게 많은 성령 충만한 이들이 곳곳에&amp;nbsp;진을 치고 있는데&amp;nbsp;-마치 바알에게 무릎 굻지않은&amp;nbsp;&amp;nbsp;7000명처럼- 왜 한국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있으며, 한국 교회는 더 점점 무기력해지며 타락하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짙다.&amp;nbsp; 인터넷이나 사람들 모이는 곳에서는 예외없이 예수쟁이들니 개독교니 사기꾼들이니하는 말들로 아무런 두려움(?)없이 성령충만할것 같은&amp;nbsp;유명한 목사, 장로(이중엔 대통령도 있다), 유명 인사&amp;nbsp;... 등등을 힐난하며 오히려 즐기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amp;nbsp; 그런말 들을때 딱히 반론할 마땅한 재료들이 없는 것이 더 문제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역시 목사지만, 목사들이 더 문제 많음을 알고있다.&amp;nbsp; 가만히 관찰해보면 강단에서 거룩과 진실함과 성령충만을 더 크게 외친분들이 오히려 더 정치적이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경우가 있었다.&amp;nbsp; 개인적으로 만나면 괜찮은데, 꾼들로 모이면 이상하게도 변하는 카멜레온 같다.&amp;nbsp; 목사만 회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것이라는 자조섞인 우스개 소리가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상 요즘,&amp;nbsp;나는 절망하고 있다. 내 자신을 보면서 그리고 이땅의 영적 현실을 보면서... 말은 거창한데&amp;nbsp;성령과의 동행에서 나오는 진실한 능력이 없음으로 인한 무력감...&amp;nbsp; 바울처럼 말에는 졸하나 삶은 능력있어야 할텐데... 멀고 요원해보여 가슴을 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너무 비관적으로 글을 시작하지만, 현실은&amp;nbsp;실상 더 심각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amp;nbsp;있다.&amp;nbsp; 이런저런 문제들을 나열하고 비관하고 고찰한다면 너무나 비참할것 같아서... 그리고 너무 나댄다고 할것 같아서 그저 &apos;알지요...&apos;하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멈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도행전은 이런&amp;nbsp;고통 가운데 함께 읽고 나누었음 한다.&lt;/p&gt;
&lt;p&gt;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희망을 찾아 보고 싶다.&amp;nbsp; 진실로 초대교회부터 지금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신실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케하심이 과연 어떤 모습이고, 그것이 어떻게&amp;nbsp;우리 삶 가운데 누려져야 하는가를&amp;nbsp;알아가 봤음한다.&amp;nbsp; 그저 원론적인 이야기나 열정적인 기도 가운데 감나무의 감이 내 입에&amp;nbsp;뚝 떨어지거나 소 뒷걸음 치다가 쥐잡는 격의&amp;nbsp;그런 요행수의&amp;nbsp;&amp;nbsp;성령충만이 아닌 진짜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떻게 계시며 어떻게 인도하시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시는가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amp;nbsp; 바램을 적고 보니깐 너무 거창한것 같지만, 정말이지 알수있음 좋겠다. 그저 기도원이나 교회나 사적인 자리에서 뻐기고 뭔가 있어보이고 은근한 영적 협박 용도의&amp;nbsp;그런 성령 충만이 아니라, 내 삶을 변화시켜가며, 사회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제자이고 싶을따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사도행전 1장은 대략은 이러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먼저는 기다림에 대한 명령이 주어진다.&amp;nbsp; 부활하신후 40일간 지상에서 머무시던 예수님께서 남기신 첫번째 명령이 &apos;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amp;nbsp;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amp;nbsp;받으리라.&apos;이다.&amp;nbsp; 이것은 굉장한 기대감을 발생시키는 약속이며 명령이다.&amp;nbsp; 이 명령의 의미와 긴장감을&amp;nbsp;관찰하며 이야기 할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는 승천하시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질문과 답변이다.&amp;nbsp; 앞에서의 기대감이 극도에 이르런 상황에서&amp;nbsp;제자들의 들뜬 질문과 그에 대한&amp;nbsp;예수님의 답변은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amp;nbsp;&amp;nbsp;또한 말씀을 마치시고 순식간에 올리워가시는 예수님&amp;nbsp;밑에서 제자들은&amp;nbsp;황망스럽기만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세째는&amp;nbsp;120명의 제자들이 모여&amp;nbsp;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13번째 사도를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모습이다. 기다리라는 명령 가운데 행해진 갸륵한(!) 행동에서 오는&amp;nbsp;2%&amp;nbsp;부족함이 얼굴을 훅 붉히며&amp;nbsp;밀려오는&amp;nbsp;당혹감! 그리고&amp;nbsp;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소망을 이야기 할수있는&amp;nbsp;가능성이 열림으로&amp;nbsp;1장이 마무리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격적인 성령충만의 유형들이 나타나는 본문은 아니지만, 1장의 이해는 앞으로있을 성령 충만함을&amp;nbsp;헤아려가는 밑그림이 되기때문에 한부분 한부분이 그래서 중요하다.&amp;nbsp; &lt;/p&gt;&lt;/div&gt;</content>
                  
   </entry>
   <entry>
      <title>사도행전 말씀을 공부하며 연재하려고 준비중입니다...</title>
      <id>http://kyfamily.org/zbxe/28561</id>
      <published>2009-11-17T17:35:58P</published>
      <updated>2010-03-19T20:02:56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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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안녕하세요... 너무나 오랫만에 칼럼란에서 안부합니다. &lt;/p&gt;
&lt;p&gt;마태복음의 두번째 설교 &quot;파송설교&quot;에 이어서 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 말씀을 한장씩 준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amp;nbsp; &lt;/p&gt;
&lt;p&gt;원래 계획은 마태복음의 다섯개 설교를 시리즈로 다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역량이 많이 모자라고 공부가 충분하지 않아서 조금더 천천히 다루는 것이 낫겠다 판단하였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도행전 말씀은 누가복음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많이 읽혀지고 설교로도 많이 애용되는 본문입니다.&amp;nbsp; 주일학교를 거쳐오신 분들이라면 선생님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과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어킨 기사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찬양 불렀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lt;/p&gt;
&lt;p&gt;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이기에 여러분에게 본문의 내용을 함께 공부하기가 일단은 수훨하리라 예상합니다.&amp;nbsp; 그러나 몇번 말씀 드린것처럼, &apos;내가 잘 알고 있는 본문&apos;이라는 것에 함정이 있습니다.&amp;nbsp; 안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뭘 새삼스럽게 다시 공부해! 하실수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을 공부해 갈 몇가지 제목을 먼저 나눕니다.&amp;nbsp;&lt;/p&gt;
&lt;p&gt;1.&amp;nbsp; 2% 부족한 사람들...&lt;/p&gt;
&lt;p&gt;2.&amp;nbsp; 성령 충만 - 그 첫번째 모습 ; 성령 임재 그리고 성령 충만이 뭐지?&lt;/p&gt;
&lt;p&gt;3.&amp;nbsp; 성령 충만 - 그 두번째 국면 ; 오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은 무엇일까?&lt;/p&gt;
&lt;p&gt;4.&amp;nbsp; 성령 충만 - 그 세번째 양상 ; 성령의 충만함을 내게도 주옵소서...&lt;/p&gt;
&lt;p&gt;5.&amp;nbsp; 성령 충만 - 그 네번째 이해 ; 성령 충만함과 초대 교회 &lt;/p&gt;
&lt;p&gt;6.&amp;nbsp; 성령 충만 - 그 다섯번째 접근 ; 애매하지만 너무나 절실한 문제(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lt;/p&gt;
&lt;p&gt;7.&amp;nbsp; 성령 충만 - 그 여섯번째&amp;nbsp;은혜 ;&amp;nbsp;이제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긴급 상황!) - 돌들로 소리치게 하소서!&lt;/p&gt;
&lt;p&gt;8.&amp;nbsp; 성령 충만 - 그 일곱번째 헤아림 ; 주님, 제가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게끔 성령으로 채우소서...&lt;/p&gt;
&lt;p&gt;9.&amp;nbsp; &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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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급 - [파송설교 6]</title>
      <id>http://kyfamily.org/zbxe/25819</id>
      <published>2009-04-22T22:45:30P</published>
      <updated>2010-05-12T10:00:47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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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 face=&quot;&apos;굴림&apos;&quot;&gt;&lt;strong&gt;1. 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lt;/strong&gt;&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rgb(0, 0, 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apos;굴림&apos;;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amp;nbsp;/ 예수님의 옅은 한숨소리&amp;nbsp;&lt;/strong&gt;&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rgb(0, 0, 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apos;굴림&apos;;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3. 파송설교, 그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개털모자냐 황금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lt;/strong&gt;&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rgb(0, 0, 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apos;굴림&apos;;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4. 파송설교, 그 세번째 메시지(마 10:16~23)&amp;nbsp;;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5. 파송설교, 그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 ;&amp;nbsp;어떻게 삶이 복음일 수 있는가?&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6. 파송설교, 그 다섯번째 메시지(마 10:34~39, 40~42) ; 경고와 상급&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lt;/strong&gt;&lt;/fon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9a0000&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파송설교&amp;lt;6&amp;gt; - 다섯번째 메시지 ; 마 10:34~39, 40~42 /&lt;/strong&gt;&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4&amp;nbsp;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lt;/p&gt;
&lt;p&gt;35&amp;nbsp; 내가 온 것은&amp;nbsp;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lt;/p&gt;
&lt;p&gt;36&amp;nbsp;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lt;/p&gt;
&lt;p&gt;37&amp;nbsp;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lt;/p&gt;
&lt;p&gt;38&amp;nbsp;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lt;/p&gt;
&lt;p&gt;39&amp;nbsp;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40&amp;nbsp;&amp;nbsp;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lt;/p&gt;
&lt;p&gt;41&amp;nbsp;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lt;/p&gt;
&lt;p&gt;42&amp;nbsp;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이제 예수님의 파송설교는 끝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amp;nbsp; 그런데 그 마무리가&amp;nbsp;당황스럽다.&lt;/p&gt;
&lt;p&gt;뭔가 우리가 착각할수있음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또한 제대로 알아들어&amp;nbsp;주님의 뜻대로 행했을 경우에 주실 어떤 상급에 대한 말씀이 본문이다.&amp;nbsp; 하지만 그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다.&amp;nbsp; 좀더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상과 벌에 대해 말씀하시면&amp;nbsp;이해하기가 편했을 것 같다.&amp;nbsp;&lt;/p&gt;
&lt;p&gt;그러나&amp;nbsp;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amp;nbsp;이 본문 자체가 가지는 또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마무리되는 이 본문에 대한 접근은&amp;nbsp;대체로 다음과 같다.&lt;/p&gt;
&lt;p&gt;첫째는 예수님께서&amp;nbsp;파송한 제자들 즉 우리들에게 주시는 착각하지 말것에 대한 경고와 주실 상급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왜 이러한 상과 벌에 대한&amp;nbsp;약속을 쉽게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게 보이도록 제시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amp;nbsp;36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예수님이시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예수님께서 어떤 가정에 영접됨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상황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우리에게 너무 당황스럽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신 복된 가정의 모습을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간절히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배워왔기에&amp;nbsp;&apos;뭔가 잘못되었어!&apos;라고&lt;/font&gt; &lt;font color=&quot;#000000&quot;&gt;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물이다.&amp;nbsp;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콩가루 집안이&amp;nbsp;된다니...&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amp;nbsp;이 가족을 자세히 살펴보자.&amp;nbsp;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아들과 딸이 있다. 그 아들은 아내를 취하여 집안에 들어와 함께 살아간다. 자연스럽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들과 딸을 자녀로 둔것으로 설정되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흠잡을 것 없는 좋은 가족 구성원을 형성하고 있다. 아주 다복한 가정이라 여겨질만하다.&amp;nbsp; 그리고는 별다른 문제없이 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온가족이 세례받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더욱더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거듭날것이다.&amp;nbsp; 그런데 이 기대가 산산조각난다. 오히려 아들내외가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에 분란이 생겼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아버지와 아들, 딸과 엄마 그리고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뭔가 불편한 일이 생겼다. 그래서 불화가 깊어지고 어느 시점에선가는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며 등을 돌렸다.&amp;nbsp; 과연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 본문은&amp;nbsp;구약&amp;nbsp;소선지서 미가 7장 6절에 있는 말씀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예수님께서 파송설교의 말미에&amp;nbsp; 미가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심은 그때의 상황과 종말의 시대에 파송받는 제자들 즉 우리들의 정황이&amp;nbsp;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는 점을 의미한다.&amp;nbsp;그렇기때문에 미가서에서 이 본문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amp;nbsp;살피는 것은&amp;nbsp;파송설교의 결론부를 이해하는데 필수 사항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amp;nbsp;&amp;nbsp;&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 두 선지자는 동시대에 동일한 대상들을 향하여 선지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그 접근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amp;nbsp; 이사야는&amp;nbsp;주로 정치 외교적, 국가적 문제점들에 대한 접근이&amp;nbsp;많고, 이에 비해서 미가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행위 등의 개인적 문제에 집중하였다.&amp;nbsp;&amp;nbsp;미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믿음이 개인들의 심령 안에서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와 그로인해&amp;nbsp;아무런 영적 감흥이 없는 여러 의식들 그리고&amp;nbsp;죄에 대한 무감각한 현실적 반응들을 주목하며 반응한 선지 사역이었다.&amp;nbsp;&amp;nbsp;&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미가서 7장은 이스라엘의 부패로 인한 죄의 결과를 다루며 다시한번 어둠 속에서 소망을 언급하는&amp;nbsp;말씀이다.&amp;nbsp; 그중에서 인용되고 있는 6절은&amp;nbsp;이스라엘의 부패로 인해 드러나고 있는 적나라한 죄의 결과&amp;nbsp;중 한 부분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미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amp;nbsp;진실한 영적&amp;nbsp;열매가 없고 단지 무성한 잎들만 가득한 모습과 같다고&amp;nbsp;표현한다. &apos;나는 여름 실과를 딴후와 포도를 거둔후 같아서&apos;...&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그리고 이어서 &apos;선인이 이 세상에서 끊어졌음&apos;과 &apos;정직한 자가 없는&apos;&amp;nbsp;현실을 토로한다.&amp;nbsp; 영적 열매가&amp;nbsp;없기에 아무런&amp;nbsp;믿음의 영향력도 없는 빈겉데기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이다.&amp;nbsp; 4절에서 &apos;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다&apos;라는 표현이&amp;nbsp;섬뜩한 현실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어지는 본문은 이러한&amp;nbsp;회색빛 상황에 덧붙여진&amp;nbsp;좀더 잔혹한 현실을 덧붙인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apos;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amp;nbsp;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5절).&amp;nbsp;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6절)&apos;&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 상황은 미가 선지자 시절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의 이간질 상황에서부터 비롯된 현실이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먼저 당시의&amp;nbsp;상황을 간략하게&amp;nbsp;이해하자.&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사야 6장에 유다를 일약 강대국의 반열에 올린 유다왕 웃시야의 죽음 기사가 있다(B.C 742년경). 이때&amp;nbsp;이사야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사야는 다윗가문의 제사장 출신이며 귀족출신이다. 반면에 미가 선지자는 아모스처럼 유다 변방의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때, 유명한 환상을 목격하고 부르심을 받지만 정작 한동안 예언활동을 하지 않는다(웃시야의 아들인 요담이 죽을때까지-약16년/ 왕하15:33). 그러다가 아하스가 유다왕으로 즉위한 직후(B.C 735~715년경)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까지&amp;nbsp;약 20여년간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미가는 아사야와 거의 동시대인 히스기야 왕때 주로 예언활동을 벌인 선지자이었다.&amp;nbsp;&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사야는 정치적 식견을 갖춘 귀족출신답게 유다의 정치적&amp;nbsp;외교적 혼란과 사회적 불의와 타락에 대해 집중해서 예언하였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반면에 미가는 소박한 농촌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와&amp;nbsp;농민 그리고 목자들의 고통을&amp;nbsp;몸으로 체험하며 예언하였다. 아모스와 흡사하게도 개인적인&amp;nbsp;아픔을 공감하는&amp;nbsp;사회악에 대해 민감했으며&lt;/font&gt;, 종교생활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amp;nbsp;종교 활동에 대해 목소리를&amp;nbsp;높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사야는 정치적인 구도와 외교문제에 대해 왕들과의 담판에&amp;nbsp;장점이 있었고, 미가는&amp;nbsp;백성들의 삶의 터전에 가까웠기에&amp;nbsp;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다 어려운 그 시기에 부를 축적하는 비양심적인 상류층과 거짓 예언자들의 폐해 그리고 재판관과 대지주들의 부정을&amp;nbsp;언급하며 규탄할수있었다.&lt;/p&gt;
&lt;p&gt;이처럼 같은 시대의 동일한 문제점이었지만, 그 접근방식과 이해의&amp;nbsp;폭이 달랐기에, 두 사람의 선지 사역은 서로 합하여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할수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런데 그 시기는 그렇게&amp;nbsp;쉬운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lt;/p&gt;
&lt;p&gt;정치적으로나 외교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때였다.&lt;/p&gt;
&lt;p&gt;강대국을&amp;nbsp;만들었던 웃시야&amp;nbsp;왕과 그 아들 요담이 죽고 난후, 아하스가&amp;nbsp; 유다왕이 되었다. 당시 아하스는&amp;nbsp;겨우 20세 청년이었다(왕하 16:2).&lt;/p&gt;
&lt;p&gt;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더불어 유다를 공격하여 아하스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amp;nbsp;반 이스라엘 성향을 가졌기&amp;nbsp;때문이었다. 그로 인해&amp;nbsp;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공격앞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아하스 왕은 다소&amp;nbsp;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로인해 유다는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파국으로&amp;nbsp;몰리는 상황을 돌이킬만한 역량도 없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결과,&amp;nbsp;아하스는 유다를 스스로 앗수르 제국의 신하 나라로 격하시켰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만 믿고 바랄것을 권고하지만, 이미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의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 더 매력적이었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 처럼 비춰졌던 것이다.&amp;nbsp; 그리고 이런 상황에 걸맞는&amp;nbsp;외교적 역량이라고 생각한것 같다.&lt;/p&gt;
&lt;p&gt;앗수르는 아하스왕의 이런 외교적 제안을 수용한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여지없이 파괴하며 다메섹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린다. 그리고는 유다를&amp;nbsp;앗수르의 신하나라로 공식화하고 매우&amp;nbsp;많은 조공을 요구한다. 말그대로 앗수르의 작은 속국이 되고 말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결과, 예루살렘에&amp;nbsp;앗수르의 신전들이 세워지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몰렉신에게 수많은 자식들을 인신공양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하스 왕 자신이 자신의 아들을&amp;nbsp;몰렉신에게 제물로 던져 버린다(왕하 16:3). 그리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창고에서 금은을 취하여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그렇게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는 겉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앗수르에게 막대한 조공을 받침으로 겨우 지위를 인정받는 속국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아하스를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른다.&amp;nbsp;우유부단함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amp;nbsp;아하스왕과 달리 히스기야왕은 이름(여호와가 강하게 하다)만큼이나 의욕적이고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다.&amp;nbsp;&amp;nbsp;히스기야 왕은&amp;nbsp;종교개혁을 통하여&amp;nbsp;앗수르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amp;nbsp;이러한 반란을&amp;nbsp;위해서 히스기야 왕은 애굽과 블레셋 그리고 모압과 암몬을 이용하려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amp;nbsp;오히려 이 일로 말미암아 앗수르에 한번 더 항복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때 앗수르 제국은&amp;nbsp;사르곤 왕의&amp;nbsp;죽음이라는 새로운 분위기 반전을 제공한다.&amp;nbsp;&amp;nbsp;히스기야 왕은 사르곤 왕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다시한번&amp;nbsp;앗수르와의 봉신관계를 파기하며 종교개혁의 고삐를 죄었다. 그리고 사르곤 왕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앗수르 제국에 좀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바벨론과 애굽과의 동맹 관계를 맺고 그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다.&amp;nbsp; 그야말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결과로 앗수르에 대항하는 탄탄한&amp;nbsp;모양세를 갖춘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사르곤의 후계자인 산헤립이 대열을 정비하여 본격적으로&amp;nbsp;반란을 평정했다.&lt;/p&gt;
&lt;p&gt;산헤립 왕은 블레셋과 애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남유다의 남부 지역을 점령한후,&amp;nbsp;B.C 701년경에 예루살렘을 포위해 버리고 말았다.&amp;nbsp;&amp;nbsp;예루살렘은 고립되었다.&amp;nbsp;산헤립은 그의 역사서에 히스기야 왕과 남유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apos;새장에 갇힌 새&apos;&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결과는 비참했다.&lt;/p&gt;
&lt;p&gt;히스기야는 성전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벗겨내어 다시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속국이 아닌&amp;nbsp;앗수르 제국의 일개 행정도시로 전락했으며, 그 왕권마저도 대부분 앗수르에 투항한 블레셋의 왕들에게로 넘어갔다.&amp;nbsp; 그래서&amp;nbsp;단지 예루살렘만을 지배할수밖에 없는 서글픈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amp;nbsp; 당시의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었으며 혼란스러운&amp;nbsp;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상황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미가 선지자는 이러한 앗수르의 공포스러운 공격과 위협 한 가운데 있었다.&lt;/p&gt;
&lt;p&gt;미가의 고향도 앗수르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으로 피난한 상태에서 미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apos;이 지경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한&apos; 예루살렘의 현실이었다.&amp;nbsp; 정치적 외교적으로도 꼬일대로&amp;nbsp;꼬인처지이면서, 정작 일상의 삶조차도 정신 차리지&amp;nbsp;않은채 부패와 폭력 그리고 비양심적인 현실에 묻혀 사는 하나님 자녀들 모습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다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영적 열매를 맺기는 커녕 곁가지들과 잎사귀들만 무성한 종교적&amp;nbsp;의무 혹은 행사들만 가득한 현실들...&lt;/p&gt;
&lt;p&gt;가장 착하고 선한 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조차도&amp;nbsp;서로에게&amp;nbsp;가시같고 울타리 찔레같은 고통을 안겨주는 동족일 뿐이었다...&lt;/p&gt;
&lt;p&gt;그나마 유지될것 같았던 가족 혈육의 친밀함이나 신뢰조차도 무너져 버린 형국이었다.&amp;nbsp; 누가 누구의 첩자인지, 누가 누구의 득을 보려고&amp;nbsp;등뒤에 비수를 꼽을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 혼란이었다. 그것이 가족이라하더라도, 그가 아비든 아니면 딸이든 별상관이 없는 처절한 불신과 공포가 지배하던 혼란스러움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pos;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amp;nbsp;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amp;nbsp;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apos;&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어진 미가의&amp;nbsp;한마디&amp;nbsp;구절을 인용하고 있는&amp;nbsp;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잠시 질문을 정리하면, 이러한 미가서의 말씀을 왜 파송설교의 결론부에서 인용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다.&lt;/p&gt;
&lt;p&gt;왜 예수님께서는 좀더 쉽게 착각할수있는 부분을&amp;nbsp;쉽게 설명해서&amp;nbsp;딱 집어주시고(족집게 강의처럼), 그에 따른 상급과 형벌을 제시하셨더라면 파송설교가 좀더 멋있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주고 계시는가 하는...&amp;nbsp; 오히려 착각하지 말것을 주문하시면서 던져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당황스럽게하고 뭔말인가 싶게 만들고 있는 느낌이라는것이다.&amp;nbsp; 마무리의 시점에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시는 것과 같은 느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4&amp;nbsp;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lt;/p&gt;
&lt;p&gt;35&amp;nbsp; 내가 온 것은&amp;nbsp;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lt;/p&gt;
&lt;p&gt;36&amp;nbsp;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lt;/p&gt;
&lt;p&gt;37&amp;nbsp;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lt;/p&gt;
&lt;p&gt;38&amp;nbsp;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lt;/p&gt;
&lt;p&gt;39&amp;nbsp;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의&amp;nbsp;파송설교의 마무리는 이런 느낌과는 상관없이, 매우 분명하게 우리가 흔히&amp;nbsp;실수할 수 있는 바에 대한 지적이다.&amp;nbsp;&lt;/p&gt;
&lt;p&gt;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amp;nbsp;왔다라고 하시고, 가족들간에 심각한&amp;nbsp;불화가 일어날것이며 그 결과 원수사이가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단언에 사실 많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당황스럽게 하거나 혼란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말씀은 파송설교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무리 경고로 주어지고 있다.&amp;nbsp; 경고는 먼저 그 길을 걸어가보거나 경험한 자만이 알수있거나 경험하는 사실에 대한 주의이다.&amp;nbsp; 즉 소명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삶, 주님의 제자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만날수있는 어떤 과정에 대한 주의사항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다가 어느날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인격적인&amp;nbsp;교통과 믿음으로&amp;nbsp;말미암아&amp;nbsp;하나님 백성,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amp;nbsp;경험하는&amp;nbsp;것이라고한다면 우선 다행이다.&amp;nbsp; 왜냐하면 이미 우리들에게 믿음의 수많은 선진들이 있기 때문이다.&amp;nbsp; 아브라함에서부터 히브리서에서 언급되는바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음이다.&amp;nbsp; 그들의 믿음여정에서 부딪쳤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착각이나 오해 그리고 믿음의 삶이라고 확신하며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발견된&amp;nbsp;믿음의 판례들을&amp;nbsp;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다. 감사한 일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선 위의 본문을 다시 구분하면, 34~36절까지와 37~39절의 말씀으로 나눌수있다.&lt;/p&gt;
&lt;p&gt;34~36절은 먼저 언급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 여정에서 흔히&amp;nbsp;저지러는&amp;nbsp;실수, 착각 또는 생각과 확신에&amp;nbsp;대한 주님의 경고(지성적 측면).&lt;/p&gt;
&lt;p&gt;37~39절은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amp;nbsp;살아감에 있어&amp;nbsp;감정적 깊이가 고갈되어 메마른 지적 동의로만 살아가는&amp;nbsp;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감성적 측면).&lt;/p&gt;
&lt;p&gt;&amp;nbsp;&lt;/p&gt;
&lt;ol&gt;
&lt;li&gt;&lt;strong&gt;34~36절 ;&amp;nbsp;믿음의 확신에서 벗어나기...&lt;/strong&gt;&lt;/li&gt;&lt;/ol&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께서 마지막 경고의 말씀으로 주시는 첫 단추는 오고오는 많은 세대들이 가장 흔하게&amp;nbsp;그렇지만 그 결과의 영향력이&amp;nbsp;매우 심각한&amp;nbsp;파괴력을 가진&amp;nbsp;착각과 어떤 확신에 대한 것이다.&lt;/p&gt;
&lt;p&gt;이러한 과정의 출발은 매우 신앙적이며 경건하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다.&lt;/p&gt;
&lt;p&gt;그것은 종교개혁과 같이 낡고 병든 부분에 대한 발견에서 시작한다.&amp;nbsp; 그저 순응하고 못본척 살면 그만이라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함을 애써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다시금 바로잡으려는 거룩한 열정을 동반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님께서 인용하고 있는 미가서의 상황을 다시 한번&amp;nbsp;떠올려보자.&lt;/p&gt;
&lt;p&gt;젊은 왕 아하스에 의해&amp;nbsp;남유다의 영적 상황은 피폐해진 정도가 아니라,&amp;nbsp;근원에서부터 상처를 받고 무너져 내렸다.&amp;nbsp;&amp;nbsp;정치적 외교적인 계산이 깔린 친&amp;nbsp;앗수르 정책노선은 당연히 앗수르의 수많은 신들을 불러 들였으며, 아하스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당연한 결과이며 순응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 결과 중 하나가&amp;nbsp;자기 아들을 몰렉신에게 불태워 바치는 인신공양 제사의 실행!&amp;nbsp;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할일이었지만, 상황의 변화와 적응 과정에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리고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영적 배도와 파탄의 상황 중에 히스기야 왕이 세워졌다.&lt;/p&gt;
&lt;p&gt;히스기야는 나름 강력한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앗수르제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애를 쓴다.&lt;/p&gt;
&lt;p&gt;선왕의 영적&amp;nbsp;배신의 현장을&amp;nbsp;무너뜨리며&amp;nbsp;하나님의&amp;nbsp;율법의 말씀을 회복하여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을 다시금 세우기 위한 힘든 작업을 감행한것이다.&lt;/p&gt;
&lt;p&gt;얼마나 선한 열정이며 갸륵한 도전인가! 정말이지 많은 점을&amp;nbsp;본받고 받아들일 부분들이 많음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amp;nbsp;&amp;nbsp;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과 반(反)앗수르 정책의 전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뭔가 문제점이 있음을 확인할수있다. 그것은 앗수르 제국과 그 이방종교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한 종교개혁의 몸부림이 또다른 속박과 우상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실제로 히스기야 왕은 기회를 노리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르곤 왕의 죽음이라는 호기를 놓치지 않을수있었다. 그리고는 좀더 효과적으로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바벨론과 애굽과의 동맹을 맺음으로 반 앗수르 노선의 맹주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른다.&amp;nbsp;&amp;nbsp;그러나 이러한 호시절도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새롭게 일어나 대열을 정비한 앗수르의 새로운 왕 산헤립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튼튼하고 효과적이며 그리고 완벽하다 싶었던 실리적 외교 체제와 방어 태세가 한순간에 박살나 버리는 아찔함을 경험하고 만다.&amp;nbsp; 그 와중에 유다 전체는 예루살렘 도시 국가 형태로 갇혀버리게 되고, 그나마 남은 예루살렘 내에서도 종교개혁의 영향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무질서와 영적 배도 그리고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역사적 정황들 속에서&amp;nbsp;발견되는 영적 악순환의&amp;nbsp;어떤 고리가 있다.&amp;nbsp; 처음에는 북 이스라엘에서 좀 더 빈번했고, 남 유다는 그 정도가 처음에는 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amp;nbsp;북이스라엘을 닮아갔다.&amp;nbsp;&amp;nbsp;다름아닌 영적인 구조 혹은 안전을 위한 보장과 장치에 대한 세속화라고 표현할수있다.&amp;nbsp;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즉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는 바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무엘 선지자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amp;nbsp;왕정제도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안전과 체계적인 질서에 대한&amp;nbsp;자기 확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lt;/p&gt;
&lt;p&gt;하나님이 지키시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주셔서 이런저런 견고한 성읍들과 군사적 장치들의 은총을&amp;nbsp;갖추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된것이다.&amp;nbsp;&lt;/p&gt;
&lt;p&gt;전쟁의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자유롭게 역사하심 그리고 우리의 의뢰라는&amp;nbsp;믿음의 구조가 흔들린 것이다. 그 허물어진 믿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 채우심이라는 단어들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amp;nbsp; 이러한 영적 변화는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하여 일하시고, 무엇인가를 걸쳐서 완전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것이다.&amp;nbsp; 즉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뀐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물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자신이 세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가 흔히&amp;nbsp;아름답게 고백하는 &apos;당신은 축복의 통로입니다&apos;라는 말은&amp;nbsp;상당히&amp;nbsp;고무적이며 아름다운 믿음의&amp;nbsp;고백이다.&amp;nbsp; 하지만 이 말에 함정이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amp;nbsp;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큰 차이의 결과를 불러일으킬수도 있음을 이해함이 중요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나님의 역사하심을&amp;nbsp;이해하는&amp;nbsp;&amp;nbsp;방식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와 같이 정치 사회 외교와 같은 현실에 놓일때 우리는 다소 불안하고 당황스러워한다.&lt;/p&gt;
&lt;p&gt;주변의 열강들이 수시로 세력을 달리하고,&amp;nbsp;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치열한 다툼이 일시적이 아니라&amp;nbsp;일상적인 삶의 환경인 현실을 살아가노라면, 무언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 채우시는 은총이 좀더 효과적으로 그리고&amp;nbsp;예측 가능한 확신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amp;nbsp;유혹이 누구에게나 생길수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의 믿음 여정을 &apos;정처없는 나그네 길&apos;이라고 노래하지만, 정작 대책없는 듯한&amp;nbsp;현실을 마주하노라면 무언가 어설프고 가당찮아 보인다. 좀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예측가능한 믿음의 길이 오히려 더 믿음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스라엘이 그러했고&amp;nbsp;열국의 역사가 그러하다.&lt;/p&gt;
&lt;p&gt;체제를 잘 갖추면 좀더 일이 잘 진행되고, 문제가 적어 질것으로 예상했다. 더구나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께서 훨씬 더 역사하시기에 편하고 좋을것이라고 확신했다.&amp;nbsp; 북이스라엘과&amp;nbsp;남유다는 경쟁적으로 외세를 끌여들이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서로를 치기 위해서, 때로는 서로의&amp;nbsp;연합을 위해서 그리고 생존을 위하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특히 북이스라엘은 세습 왕정이 아니었기 때문에&amp;nbsp;정치적으로 아주 인기가 있어야지만 왕으로 연명할수있었다. 다윗왕가는 남유다가 전승했지만, 다윗 전통은 북이스라엘이 계승한것이었다.&amp;nbsp;&amp;nbsp;왕이 있어도 좀더 유능하고 인기있는 누군가가&amp;nbsp;나타나면 곧바로 암살당하거나 제거되는 살벌한 현실속에서 그들은 어떻게든 좋은 정치, 능력있는 외교력을&amp;nbsp;펼침으로 국익에 보탬이되는 결과를 남기기&amp;nbsp;위해&amp;nbsp;애써야만 생존이 가능했던 시대를&amp;nbsp;살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래서 북이스라엘 왕들은 서로 경쟁적으로&amp;nbsp;정치 외교 사회의 부흥과 안정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최선을 경주할수밖에 없었다.&lt;/p&gt;
&lt;p&gt;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인내함으로 길이 열리기를 소망했던 다윗의 믿음은&amp;nbsp;그저 바램일뿐이고, 당장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나고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는 정치수완을 발휘해야만했다.&amp;nbsp; 그 결과 외세를 적절히 끌어들이기 위해 외국 공주와 결혼하고 그들의 종교를 허용해줌으로 실리를 챙겼고, 외교적 마찰과 전쟁이 발발하면 외국과의 조약을 통하여 어떻게든 빨리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노력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lt;/p&gt;
&lt;p&gt;시간이&amp;nbsp;지날수록 이러한 정치 외교 국방의 모습은 점차 틀을 갖추고 세련되었다.&lt;/p&gt;
&lt;p&gt;이러한 구조에 하나님의 은총이&amp;nbsp;좀더 풍성히 임하시기만 하면, 안전하고 아름다운 국가로서 양질의 삶을 살수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남유다도 점차 이러한 실리외교와 정치력에 집중하게 된다.&amp;nbsp; 그 결과, 남유다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인 대처와 지혜로운 대안이 점차로 유능한 왕, 좋은 지도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amp;nbsp; 히스기야 왕도 종교개혁과 하나님 말씀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적을 다루기위해 또다른 적을 불러들이는 정치력에 더 의지한 것이다.&amp;nbsp; 결과는 참혹했다. 기둥의 금칠까지도 벗겨 조공으로 내놓아야 했으며, 안전을 위하여 만든 공교한 외교적 수단들과 장치들이 오히려 뒷통수를 치는 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들중 가장 선한 자가&amp;nbsp;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사람이&amp;nbsp;찔레 울타리보다 더한 기막힌 결과...&amp;nbsp; 가족이라는 최후의 보루마저도 신뢰하지 못하고 등돌려 버리는 형국일찐데 사회는 어떻했겠는가...&amp;nbsp;&amp;nbsp; 나름대로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와 구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amp;nbsp;더 잘 채워주시고 역사해주실것을 바랬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미가 선지자는 예리하게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이러한&amp;nbsp;영적 실패의 움직임에 대한 고발은 이미 사사기 말미에 묘사되는 참혹한 영적 실패의&amp;nbsp;현장에 먼저 소개되고&amp;nbsp;있다.&amp;nbsp; 재미있게도 사사기에 나오는 그&amp;nbsp;사람의 이름이 미가 선지자와 같다.&amp;nbsp; 사사기 17장에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미가라 이름하던 사람...&amp;nbsp;&amp;nbsp; 사사기의&amp;nbsp;2가지&amp;nbsp;중대한 결말 중 하나인 이 본문에서&amp;nbsp;일어나는 소소한 어떤 일상의 모습이, 장차 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끈&amp;nbsp;불행의 씨앗이었음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사기 17장의 간략한 내용은 이러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에브라임&amp;nbsp;어느 산골에 미가의 어머니가 은 1100개를 잃어버리는&amp;nbsp;사건이 발생했다.&lt;/p&gt;
&lt;p&gt;당시에 레위인의 연봉이 은 10개 정도였음에 비추어볼때, 상당한 거금을 미가의 어머니가 모았음을 알수있다.&amp;nbsp;어느날 돈을 도둑맞았다. 어머니는 돈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동네동네를 다니면서 그 돈을 훔쳐간 도둑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실것이라고 외치고 다녔다.&amp;nbsp;&amp;nbsp; 그랬더니 어느날, 아들&amp;nbsp;미가가 자신이&amp;nbsp;훔쳤다고 실토하며 어머니께 다시 돌려드렸다. 미가는 신의 저주가 두려웠던 것이다.&amp;nbsp;어머니는 막상 돈을 훔친 사람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서는 경악한다. 얼른 자신의 저주를 철회한다. 그리고는 &apos;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한다&apos;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미가가 돌려준 1100개의 은중에서 은 200개로 신상을 하나 만들고 여호와께 거룩히&amp;nbsp;드리고 아들의 집에 신당(예배당)을 건축한다. 미가와 그 어머니는 그곳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죽복을 위하여&amp;nbsp;에봇과 드라빔도 만들어두고, 아들 중 한명을 제사장 삼아 예배 드리게 한것이다.&amp;nbsp; 이러한 조치는 도둑질에 대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한 영적 몸부림이었던 것이다.&amp;nbsp; 일견 보기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준비가 잘 된것같아 보인다. 신당도 짓고, 신상도 거액을 들여 만들었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제사장까지 세웠으니 말이다...&amp;nbsp; 그러나 미가는 뭔가 아쉬웠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돌이켜 복을 받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겼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던중에 그 마을에 정통 레위인 청년이 찾아왔다.&amp;nbsp; 미가는&amp;nbsp;정말 기뻐하면서 그 청년 레위 사람을 자기 아들 삼을 정도로 극진하게 대우했고, 두둑한 연봉과 선물등을 내세워 그 집안의 제사장이 될것을&amp;nbsp;요청했다.&amp;nbsp; 떠돌이 레위 청년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함으로&amp;nbsp;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절에 미가는 이렇게 고백한다.&amp;nbsp; &quot;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야 여호와께서 내게 복주실줄 아노라...&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얼핏 지나칠수있을 법한 본문이지만, 그 영적 폐해는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멸망으로 이끌수있는 아주 민감한 영적&amp;nbsp;아킬레스건임을 사사기 저자는 우려한다.&amp;nbsp; 미가가 마지막절에서 언급하는 믿음의 확신- 이제서야 드디어 하나님께서 복주실꺼야...! -은 이제 끈질기게도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amp;nbsp;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흔해지며 더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이러한 뿌리 깊은 영적 폐해에 눈뜰것을&amp;nbsp;원하심이다.&lt;/p&gt;
&lt;p&gt;착각하지&amp;nbsp;마라,&amp;nbsp;저절로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토록 옷깃을 여밀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우리가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이런저런 주님의 명령대로 잘 지켜 행하면 그 결과가 내가 기대한 아주 멋드러진 해피엔딩일것이라는&amp;nbsp;생각과 기대 그리고 확신에 대해 도전하시며 경고하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인용된 말씀의 상황 도래는 어느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amp;nbsp;영적 폐해는 심각하다.&lt;/p&gt;
&lt;p&gt;서서히 진행되지만 그 위력은&amp;nbsp;매우 크다.&amp;nbsp;나라와 민족 그리고 개인이 멸절하는 어려움을 가져온다.&amp;nbsp; 예수님은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면서&amp;nbsp;나도 모르는 사이에 퍼지는 암세포와 같은 영적 환상을 내려놓을 것을 촉구하신다.&amp;nbsp;&amp;nbsp;제대로된 신학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 그릇&amp;nbsp;적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일 수 있음을 알리시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우리는 파송받은 나그네 여정이며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영적 순례자들이다.&lt;/p&gt;
&lt;p&gt;이 길위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었고&amp;nbsp;성실한 삶이었다면 그것에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amp;nbsp; 이런 믿음의 여정을 흥정의 무기로 삼지 않기로 결단함이 필요하다.&amp;nbsp; 인간에게있어 보상심리가 얼마나&amp;nbsp;강한지는&amp;nbsp;스스로가&amp;nbsp;잘 알고 있다.&amp;nbsp; 주고받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사회생활이고,&amp;nbsp;이런 흥정에 있어 무언가 조금이라도 손해봤다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하거나 자기 몫을 챙기려 애쓰는 이들이 바로&amp;nbsp;우리 자신의 모습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잘못된 믿음의 확신에서 벗어남으로 자족하며 감사하는 은총의 삶 - 그것이 부르심을 받아 파송받은 제자의 삶인것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amp;nbsp;&amp;nbsp; &lt;font size=&quot;2&quot;&gt;&lt;strong&gt;37~39절 ; 돌같은 내 마음...&lt;/strong&gt;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amp;nbsp;살아감에 있어&amp;nbsp;감정적 깊이가 고갈되어 메마른 지적 동의로만 살아가는&amp;nbsp;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감성적 측면).&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예수님의 첫번째 경고는 지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면, 두번째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우리의 감성적 측면에서 주어지는 말씀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7&amp;nbsp;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lt;/p&gt;
&lt;p&gt;38&amp;nbsp;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lt;/p&gt;
&lt;p&gt;39&amp;nbsp;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부분이&amp;nbsp;다소 지적인&amp;nbsp;측면이 강했기때문에&amp;nbsp;두번째 경고는 감성적이다라고 표현을 했지만,&amp;nbsp;주님의 두번째 경고는 감성이&amp;nbsp;살아있는 실천 정신에 관한것이다.&lt;/p&gt;
&lt;p&gt;감성이 녹아있는 실천력이&amp;nbsp;부족한 모습은 한마디로&amp;nbsp;표현하면 게으름이다.&amp;nbsp; 머리로써는 훤히 아는데 손발이 움직여주지 않는것... 시쳇말로&amp;nbsp;귀찮음니즘!&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7절은 그야말로 시기심 가득한 속좁은&amp;nbsp;이의 투정같아 보인다.&lt;/p&gt;
&lt;p&gt;예수님은 덜떨어진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런&amp;nbsp;유치찬란한 말씀을 하심일까?&amp;nbsp;&amp;nbsp;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마지막 경고의 부분에서 오해받을 만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계시는가 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문에서 비교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amp;nbsp;아들, 딸 그리고&amp;nbsp;예수님이시다.&amp;nbsp; 또한 이러한 비교의 방법에 있어서 얼마나 더 사랑하고 아끼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점에 있어서 &apos;나보다 더&amp;nbsp;사랑하는&apos; 정도에 따라서 합당한 파송받은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별하신다고 언급하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점에 있어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강도 혹은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인 기준만 있을 따름이다.&amp;nbsp; 제자들이 자기 부모님이나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도에 비교해서 더하거나 덜한것을 문제&amp;nbsp;삼으시겠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선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lt;/p&gt;
&lt;p&gt;만일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감정 기준선을 절대적으로 정해놓으셨더라면 아마도 &apos;여러번 혹은 매우&amp;nbsp;잦은 정도로&apos; 주님께 합당치 못한 제자일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대신에 내 감정의 적절한 시점인 가족들이 기준으로 해서 &apos;이것 보다 조금더&apos;하심으로 다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amp;nbsp;(나만 그런가? ^^*)&lt;/p&gt;
&lt;p&gt;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말씀과 진리의 기준점이 아주 분명하고 확고하게&amp;nbsp;그리고 높게 정하시는 주님의 기준점이 여기서는 다소 유동적이어서 얼마나&amp;nbsp;좋은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두번째 경고에서&amp;nbsp;인격적인 교통의 끈이 살아있는 믿음의 관계가 유지될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얼마 있지 않아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실 예수님,&amp;nbsp;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그저 성화와 같은 그림들과 말씀 안에서 상상만으로 그분을 그려내야 하는 우리들에게있어서 인격적 교통은 사실상 만만치 않은 큰일이다.&lt;/p&gt;
&lt;p&gt;눈에 늘 보이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은 미운정 고운정 듬뿍 들며 살아가기에&amp;nbsp;때론 미워하다가도 돌이켜서는 뗄래야 뗄수없는 가족의 사랑과 유대감을 끈끈하게 드러내지만,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 주님과의 관계와 유대감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lt;/p&gt;
&lt;p&gt;그렇기때문에 주님과의 첫사랑의 감격에 겨워할때는 오직 예수를 고백하며, 주님없이 못살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고백하지만, 그것도 잠시일뿐이다. 시간이 흘러가노라면 그때의 감동은 희미해지고 그저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혹은 타인의 눈살에 겨워 예수님을 고백하며 따라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부르시고 사명주셔서 파송한 당신의 제자들과 인격적 교통, 사랑의 소통이 있으시기를 소망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파송받은 제자의 삶을 변치않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임을 주님은 잘 알고계시기 때문이다.&amp;nbsp;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30여년 세월과 공생애의 기간 내내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의 교통과 사랑이 변했거나 식었다면, 마지막 십자가는 없었을 것이다.&amp;nbsp; 자신의&amp;nbsp;몫에 태인&amp;nbsp;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시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가족들끼리도 함께 부딪치며 소통함이 원활치 못하면 남보다 못할경우가&amp;nbsp;왕왕있다. 멀리있는 친척보다 이웃이 더&amp;nbsp;나을경우가 있다.&amp;nbsp;&amp;nbsp;부모 자식간에도 인격적 존중과 신뢰가 깨어지면 상처와 원망 그리고 무관심만이 그 자리를 채울뿐이다.&amp;nbsp; 때론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원망하다가도 이내&amp;nbsp;대화와 사랑으로 인내하고 양보함으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신뢰와 사랑&amp;nbsp;그리고 믿음이 충만해져 가는 것이 가족이다. 부모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시간을 쏟을때에만 사랑은&amp;nbsp;자라가고 커져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님과의 교통이 이러한 끊임없는 영적 교통이 전제되지 않는다면,&amp;nbsp;눈에 보이는 가족들끼리도 서로&amp;nbsp;멀어지고 무관심해지듯이 예수님과의 관계도 심드렁해지고 그저그런 관성에 의한, 습관같은&amp;nbsp;믿음 생활뿐일것은 너무나 당연하다.&amp;nbsp;예수님은 이점을 우려하신다. 이렇게 흘러가버린다면 정작 중요한 십자가를&amp;nbsp;발견하고서도 &apos;내가 왜?&apos;하면서 회피해 버릴것이다.&amp;nbsp;내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를 위해서&amp;nbsp;간이나 신장도 떼어주겠지만, 무관심하며 미워하며 지낸다면 &apos;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apos;라며 외면하는 것과 같음이다.&amp;nbsp;&amp;nbsp;예수님은&amp;nbsp;변치않은&amp;nbsp;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셨건만,&amp;nbsp;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면 &apos;주님 이건 하겠는데, 그건 좀 곤란한데요...&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성도들간의 교통과 헌신 그리고 나눔을 통하여서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영성 개발을 통해서든지&amp;nbsp;혹은 좋은 공동체의&amp;nbsp;울타리 안에 거하든지간에,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토록 믿음의 허리를 동여매는것!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그것만이 최후의 십자가를 질수있는 길임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7&amp;nbsp;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lt;/p&gt;
&lt;p&gt;38&amp;nbsp;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lt;/p&gt;
&lt;p&gt;39&amp;nbsp;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8절에서 말씀하시는 &apos;자기 십자가를 지는것&apos;의 전제조건이 바로 37절의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통, 사랑의 고백임을 확인했다.&lt;/p&gt;
&lt;p&gt;이러한 감성적 회복은 구약성경에서도 확인됨을 우리를 확인할수있다.&amp;nbsp; 아가서의 존재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amp;nbsp;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야들야들한 감성적 언어와 정서의 회복을 꾀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장치와도 같은 말씀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amp;nbsp;이러한 정서적 감성적 회복과 지속력만을 언급하고 만다면 그야말로 입만 살았고 열정만 가득한 교회의 모습을 만나게 될 뿐일것이다. 그렇찮아도&amp;nbsp;세상 사람들은 말만 잘하는 시끄러운 집단으로써의 교회 인식이 팽배해 있는 판국에...&lt;/p&gt;
&lt;p&gt;예수님은 지적&amp;nbsp;그리고 감성적 회복과 아울러 주시는 결정적 경고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lt;/p&gt;
&lt;p&gt;이 부분은 감성적 회복의 영역에 해당한다.&amp;nbsp;감성이라는것, 정서라는 것은 단지 회복만 되어서는 곤란하다.&amp;nbsp; 사랑하는 감정이나 정서가 너무 충일하다보면 오히려 타인을 괴롭게하거나 문제가 발생하게끔 되어있다.&amp;nbsp;&amp;nbsp; 조증으로서의 급격한 정서의 변화는&amp;nbsp;적극적 치료의 대상이다. 무조건 혹은 획일적으로 정서나 감성이 업(up)되는 것은 돌같은 마음보다는 흥미롭지만, 위험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학과&amp;nbsp;적절한 적용이 그 첫째 경고이듯이,&amp;nbsp;주님께 대한 인격적 감성적 교통과 아울러 그&amp;nbsp;영적 감수성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적절한 적용점이&amp;nbsp;&apos;자기&amp;nbsp;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apos;이다.&lt;/p&gt;
&lt;p&gt;바른 적용으로써의 &apos;자기 십자가를 짊&apos;은 예수님의 길로서의 실천을 강조한 표현이다.&lt;/p&gt;
&lt;p&gt;헌신과 땀 흘림이 없는 사랑은 사탕발림이다.&amp;nbsp;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한다. 오래참고&amp;nbsp;견디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랑치&amp;nbsp;않으며 온유함으로 설때만이 참된 사랑 - 십자가의 사랑임을&amp;nbsp;말할수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십자가는 죄에 대한 만족이다.&lt;/p&gt;
&lt;p&gt;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상처입고 고통받는 모든 아픔의 해결책은 그 아픔을 그저 싸매어 주고 낫게 해주는 것으로 그침이 아니라, 충분히&amp;nbsp;육체적 정서적 만족이 채워질때까지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할때만이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짐을 몸소 보여주심이다.&amp;nbsp;&lt;/p&gt;
&lt;p&gt;오경의 다섯가지 제자 제도에서도 여실히 보여지듯이 죄의 해결을 위한 총출동한듯이 제사드리고&amp;nbsp;몇배씩이나 배상해줄때에만 비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amp;nbsp; 십자가는 이처럼 이땅의 회복을&amp;nbsp;위한 주님의 방법 그리고 선택이었다.&amp;nbsp; 십자가는 입만&amp;nbsp;살아있음이 아니고,&amp;nbsp;모양만 그럴듯하게 멋진 것이 아닌,&amp;nbsp;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헌신과 노력의 땀이 베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의 감성적 회복과 유지는 그저 책상머리에 앉아서 멋있는 QT를 통하여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다.&amp;nbsp;멋진 설교와&amp;nbsp;열정적 찬양집회를 통하여 회복되며&amp;nbsp;유지됨이 아니다.&amp;nbsp;&amp;nbsp;잠시 업(up)될수는 있다.&amp;nbsp;그러나 잠시일뿐이다. 돌아서면 다시 원점일 경우가 허다하다.&amp;nbsp; 자기 십자가의 길을 땀흘리며 걸어갈때에만 온전한 주님과의 감성적 교통이 건강해진다.&amp;nbsp; 누구보다 열심으로 살아가셨던 예수님처럼, 내게 태워진 십자가의 몫을 땀흘리며 고생하며 실천함으로 고양되어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amp;nbsp;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amp;nbsp; 십자가의 헌신과 땀 그리고&amp;nbsp;두려움의 극복과 열정으로&amp;nbsp;자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우리가 먹고 나눌수있는 진정한 열매가 되셨다.&amp;nbsp;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골고다 언덕이 진실로 오병이어의 현장이다.&amp;nbsp; 그땐 남자 5000명 정도만이 배불리 먹고 남겼지만, 골고다 십자가 동산은 오고오는 모든 세대가 배불리 먹고 살만한 은혜의 동산이 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내 삶이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한그릇의 진지가 되는&amp;nbsp;삶이 될때... 진실로&amp;nbsp;예수님의 생명이 나누어지는 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amp;nbsp; &apos;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apos;&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lt;font size=&quot;2&quot;&gt;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급&lt;/font&gt;&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40&amp;nbsp;&amp;nbsp;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lt;/p&gt;
&lt;p&gt;41&amp;nbsp;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lt;/p&gt;
&lt;p&gt;42&amp;nbsp;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충분한 경고와 더불어&amp;nbsp;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상급에 대한 부분이다.&lt;/p&gt;
&lt;p&gt;그런데 이 부분도&amp;nbsp;가만히 읽어보면 다소 황당한 느낌이 일어난다. 마치 윗부분의 경고를 읽는 듯하다.&amp;nbsp; 뭔가 분명치 않다. 상급을 언급하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상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는듯이 보인다.&amp;nbsp;&amp;nbsp;상을 주기는 주는데 뭔지 모르는 어떤 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이 뭔지 모르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들은 그래도 상장 제목이라도 있으니&amp;nbsp;좀 낫다고 할수있다.&amp;nbsp; 예수님이&amp;nbsp;약속하시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은 제목도 없다.&amp;nbsp; 아니 그 자체가 이 상의 제목일런지 모른다.&amp;nbsp; &apos;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급&apos;&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개털모자든지 황금면류관 혹은 세속적이지만 평수 넓은 천국 아파트나 성능좋은&amp;nbsp;천국 도로용 자동차 같은&amp;nbsp;예측 가능한 어떤 상품이나&amp;nbsp;지위로서의 상급이라면 금세 이해가 될법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주님은 그렇게 분명한 어떤 것으로 말씀하지 않는다.&amp;nbsp;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예수님의 아주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약속은 분명하다.&amp;nbsp; &apos;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mp;nbsp;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것이다&apos;&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곳에서&amp;nbsp;분명한 첫번째 사실은 선지자의 수준과 의인의 수준과는 전혀 격이&amp;nbsp;다르고 차원이 다른 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amp;nbsp;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상을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이다.&amp;nbsp; 기실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은 이땅에서&amp;nbsp;가히 신기하고도 은총 가득한 칭송과 상급일것이다.&amp;nbsp; 마치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상급일런지도 모를 일이다.&amp;nbsp;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의인들을 향한 칭송과 기림은 대단하다.&amp;nbsp;&amp;nbsp;그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고마움이 넘쳐날 일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apos;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amp;nbsp;준 제자&apos;들을 향하여 선지자와 의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상급이&amp;nbsp;주어질것을&amp;nbsp;아주 단호하게 약속하신다.&amp;nbsp;&amp;nbsp;무엇인지는 누가 알겠는가!&amp;nbsp; 그러나 분명한 것은&amp;nbsp;이 세상의 상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amp;nbsp;분명한 점은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한&amp;nbsp;조건이&amp;nbsp;의외로 아주 분명하다는 사실이다.&lt;/p&gt;
&lt;p&gt;선지자이 상이나 의인의 상을 타기 위해서는 사실 뭘 해야 할지를 모른다.&amp;nbsp; 또한 뭔가를 하더라도 아주 특별하거나&amp;nbsp;죽음을 내놓는&amp;nbsp;일을 벌여야지만 이런 상들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amp;nbsp; 그러나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상을 받기 위해 뭘 해야 할지가 가장&amp;nbsp;어렵고 난해 할것 같지 않은가!&amp;nbsp; 사실&amp;nbsp;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amp;nbsp; 특히 오늘날처럼, 예수님이 우리 눈앞에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 처지에서는 더 난해하고 어려워 보인다.&amp;nbsp; 눈앞에 보이는 문제도 잘 처리하지 못하는데, 눈에 뵈지 않는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이거나 아죽 특별한 사람들만의 몫인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amp;nbsp;그렇지 않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섬길 아주 분명한 길을 열어 놓으셨다.&lt;/p&gt;
&lt;p&gt;예수님이 주시는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을 상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해 놓으셨다. 그것이 40절이다.&amp;nbsp;&lt;/p&gt;
&lt;p&gt;&apos;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apos;&amp;nbsp;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아주 특별한 영적 도식을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또다른 본문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amp;nbsp; &apos;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함이니...&apos;(마 18:5, 막 9:37, 눅 9:48)&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문에서는 냉수 한그릇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어떤 가련한 한&amp;nbsp;인생을 소개하고 있다.&amp;nbsp;&amp;nbsp;사막에서 한 그릇의 냉수는 한 사람의 생명을 하루정도 더 연명케하는 섬김이다. 이 사람은&amp;nbsp;그저 무시해도 좋은법한 사람일 것이다.&amp;nbsp;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lt;/p&gt;
&lt;p&gt;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영적 도식을 세우신다. 이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 말씀하심이다.&lt;/p&gt;
&lt;p&gt;주님은 제자들의&amp;nbsp;눈길이 공식에 메이지 않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의&amp;nbsp;관심이 예수님의 마음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amp;nbsp;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 상처입어 곪을대로 곪아 곧 죽음으로 내몰릴 인생에게 다가서기를 원하시고, 그런 이들을 향하여 민망한 마음을 품고 보다듬기를&amp;nbsp;원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의 상을 위하여&amp;nbsp;주님을&amp;nbsp;위하여 거창한 성전을 건축하고 멋진 엄청난 업적을 쌓아야만 할것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다.&lt;/p&gt;
&lt;p&gt;예수님은 어쩌면 그런 것을&amp;nbsp;원하시지 않으실지도 모른다.&amp;nbsp; 주님은 상처입고 나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누구하나 관심 기울이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비타민 한 조각,&amp;nbsp;몇조각의 천을 이어만든 털모자 한개 그리고 따뜻한 위로와 손길로 믿음 생활하는 것을 원하심일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를 포함하여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 상에 너무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amp;nbsp;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상에는&amp;nbsp;점점 멀어지고&amp;nbsp;있는 듯...&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이땅에서 멋져 보이는 칭찬과&amp;nbsp;사모할 만한 명예나&amp;nbsp;흡족한 자기 만족이 기다리는 상들이다.&amp;nbsp; 그러나 예수님의 상은 이땅에서의 상이 아니고, 또한 뭔지도 모르게 감이 잡히지 않기에...&amp;nbsp;그저 이러저러한 사이에 관심의 끈이 희미해지는 것이다.&amp;nbsp; 뭔가 있어!라고&amp;nbsp;믿지만, 정작 더 매력적인 상급은 이땅에서 잘먹고 잘살고 명예얻고 인기얻는 선지자와 의인의 상에&amp;nbsp;더 끌리는...&amp;nbsp;우리들의&amp;nbsp;솔직한 모습!&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님은&amp;nbsp;그런&amp;nbsp;인기있는 추구에서 눈을 돌려 낮은 곳,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장소, 별&amp;nbsp;소득없는 이들과 더불어 한잔 냉수 기울이며 다독거리는 삶, 예수님의 민망한 마음이 녹아있는 곳으로 우리도 흘러 들어가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의 초대를 다시금 확인하시며, 강조하여 외치신다.&amp;nbsp; &apos;결단코&amp;nbsp;잃어버리지 않을 상&apos;에 관심을 기울이라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제 파송설교의 경고와 상급을 정리하며 글을 맺는다.&lt;/p&gt;
&lt;p&gt;경고와 상급을 이렇듯 단박에 이해되지 않게끔 그리고 다소 모호하게&amp;nbsp;표현하고 계시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할수있을 것 같다.&lt;/p&gt;
&lt;p&gt;너만 이런 유혹과 실수에 유독 약한 것이 아니라, 참 길고도 뿌리 깊은 역사를&amp;nbsp;자랑하는&amp;nbsp;연약함임을 알리시기 위함인것 같다.&amp;nbsp; 그저 쉽게 말해버리면, &apos;그래?&amp;nbsp;좀더 정신차리고 잘 해보자!&apos;&amp;nbsp;하고 말것같아서, 그리고 잘 해볼려고 하다가 잘 안되고 계속 무너지다가 &apos;어렵네... 난 안되는가보다. 포기하자!&apos;하며 내려 놓을까 싶어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게 아니고, 이런 유혹과 실수의 역사적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며 고질적인지를 먼저 알게 하셔서, 실수해도 실패한다해도 &apos;우왓!&amp;nbsp; 정말로 이것 만만찮네... 왜 앞의 선배들이 실수하고 넘어졌는지&amp;nbsp;좀 이해가 되는걸...&apos;하며 실수를 되짚어 보고, 정작 놓치고 있었던 부분들을 재발견함으로 최후 승리자로 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녹아 있는 경고와 상급!!!&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지성과 감성적&amp;nbsp;그리고 실천적 측면을&amp;nbsp;살피고 있는 주님의 경고, 그리고&amp;nbsp;예수님의 상보다 선지자의 상이나 의인의&amp;nbsp;상이 더 매력적인것 같아 헤맬것 같은 소인배 같은&amp;nbsp;나를 향한 주님의 호소력있는&amp;nbsp;&apos;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예수님의 상급&apos;으로의 초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간 이런저런 분주한 일들로 파송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너무 늦게 올린점,&amp;nbsp;용서와 양해를 구합니다.&amp;nbsp; &lt;/p&gt;
&lt;p&gt;하하하... 그러나&amp;nbsp;어쨌던 부족한 대로&amp;nbsp;일단락 맺습니다.&amp;nbsp; 좀더 많이 다듬고 싶지만, 그러다보면 또 언제 글을&amp;nbsp;올릴수있을런지 싶어 일단&amp;nbsp;저지럽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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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어떻게 삶이 복음일 수 있는가? - [파송설교 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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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8-11-27T19:09:21P</published>
      <updated>2010-05-12T09:58:31P</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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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채덕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font color=&quot;#7106a4&quot;&gt;&lt;font size=&quot;2&quot; face=&quot;&apos;굴림&apos;&quot;&gt;1. 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lt;br  /&gt;&lt;/font&gt;&lt;/font&gt;&lt;font color=&quot;#7106a4&quot;&gt;&lt;font size=&quot;2&quot;&gt;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amp;nbsp;/ 예수님의 옅은 한숨소리&lt;/font&gt;&amp;nbsp;&lt;br  /&gt;&lt;/font&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3. 파송설교, 그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개털모자냐 황금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lt;br  /&gt;&lt;/font&gt;&lt;font color=&quot;#7106a4&quot; size=&quot;2&quot;&gt;4. 파송설교, 그 세번째 메시지(마 10:16~23)&amp;nbsp;;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lt;br  /&gt;&lt;/font&gt;&lt;font color=&quot;#7106a4&quot;&gt;&lt;strong&gt;5. 파송설교, 그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 ;&amp;nbsp;어떻게 삶이 복음인가?&lt;/strong&gt;&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amp;nbsp;* 파송설교,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amp;nbsp;;&amp;nbsp; 어떻게 삶이 복음일 수 있는가?&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4&amp;nbsp;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amp;nbsp;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lt;/p&gt;
&lt;p&gt;25&amp;nbsp;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lt;/p&gt;
&lt;p&gt;26&amp;nbsp;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lt;/p&gt;
&lt;p&gt;27&amp;nbsp;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lt;/p&gt;
&lt;p&gt;28&amp;nbsp;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lt;/p&gt;
&lt;p&gt;29&amp;nbsp;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lt;/p&gt;
&lt;p&gt;30&amp;nbsp;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lt;/p&gt;
&lt;p&gt;31&amp;nbsp;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lt;/p&gt;
&lt;p&gt;32&amp;nbsp;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lt;/p&gt;
&lt;p&gt;33&amp;nbsp;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제 본문의 말씀은 세가지의 영적 현실을 언급한다.&lt;/p&gt;
&lt;p&gt;영적이라&amp;nbsp;표현했지만, 실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상황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므로 다분히 세속적이다.&lt;/p&gt;
&lt;p&gt;상당히 멋진 표현인 &apos;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apos;으로 요약되는 우리네 삶의 현실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먼저&amp;nbsp;헤아려야 할것이 있다.&amp;nbsp; 다름아니라, &apos;영적이다&apos;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에 대한 것이다.&lt;/p&gt;
&lt;p&gt;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있어 흔하게 듣고 접하는 말이 영적인 삶 또는 영적 분별 등이다.&amp;nbsp; 누군가는 하나님의 음성을&amp;nbsp;듣고 분변하는 아주 영적 은사를 가졌다고 한다. 누군가는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 그에게로가면 많은 것이 해결받기도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또는 누군가는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amp;nbsp;듣곤한다.&lt;/p&gt;
&lt;p&gt;그 비슷한 표현으로 &apos;영성&apos;이라는 단어도&amp;nbsp;&amp;nbsp;심심찮게 듣는 말이기도하다.&amp;nbsp; 영성이 뛰어나다, 영성이 맑다, 영빨(영성의 완곡어법)이 떨어졌다 혹은 세다 등등...&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래서 간혹&amp;nbsp;신령한 사람 혹은 영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받은 이를&amp;nbsp;만나면 괜시리 주눅이 든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lt;/p&gt;
&lt;p&gt;괜스리 주절주절 뭐라도 털어놔야 할것같은 묘한 압박감도 시달린다. 나와 같은 부류라기 보다는 뭔가&amp;nbsp;우러러봐야 할 것 같고, 뭔가 차원이 다를 것 같아 친밀감을 형성하기가&amp;nbsp;어렵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왜 영적인 것에 사람들은 이토록 큰 관심과&amp;nbsp;주의를 기울이는 것일까?&lt;/p&gt;
&lt;p&gt;예수님이 영적인 삶을 살다 가셨기 때문에 그런것일까?&amp;nbsp;아니면 현실이라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파격이 일어난 것에 대한 열광일까?&lt;/p&gt;
&lt;p&gt;아니면 혹시 영적인 삶에 대한&amp;nbsp;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한채,&amp;nbsp;그저 영적 실체에 대한 과도한 환상 때문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는 영적인 삶에 대한 환상이나 열망이 학습되어 있다.&lt;/p&gt;
&lt;p&gt;막연하게 그것은 좋은 것이고&amp;nbsp;추구해야 할 바이며,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켜 가야 한다고&amp;nbsp;확신한다.&lt;/p&gt;
&lt;p&gt;누군가의 삶에&amp;nbsp;어떤 영적 기적이나&amp;nbsp;현상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amp;nbsp;부러움과 두려움을 함께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현상의 기저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기사들과 초대교회 사도들이 보여준 다양한 이적들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많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임재에 있다고 생각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럴수있고, 그렇기도 하고 그리고 잘 모르겠다.&lt;/p&gt;
&lt;p&gt;하지만 이 글에서 먼저 분명히 하고자하는 바는 &apos;영적인 것들에 의해&amp;nbsp;우리의 눈이 가리워지지 않기!&apos;이다.&lt;/p&gt;
&lt;p&gt;영적인 것에 대한 이러 저러한 환상과 생각 그리고 의견이 너무&amp;nbsp;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각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lt;/p&gt;
&lt;p&gt;우리가 정말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면 &apos;먼저 현실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보고 판단&apos;할 수 있어야&amp;nbsp;한다.&amp;nbsp;이것은&amp;nbsp;너무나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많은 문제를 안고있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amp;nbsp;권면하고 가르치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바로 이점을 우선적으로 지적하고 있다.&lt;/p&gt;
&lt;p&gt;고린도전서 5장부터&amp;nbsp;언급되는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의 시작이 바로 &apos;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음행-누가&amp;nbsp;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사건&apos;에 대한 것이다. 사실&amp;nbsp;그 본문에서의 핵심은 교회 내에 음행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amp;nbsp;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amp;nbsp; 바울은 분명하게 먼저 언급한다.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일 혹은 용납되지 않는 사건으로&amp;nbsp;먼저 규정하고 있음이다. 이 말은 당연하다는&amp;nbsp;것이다.&amp;nbsp; 새삼 별다르게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이지 않는가.&amp;nbsp;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이라면 교회 내에서 없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 않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바울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상식적인 현실이 정작 교회 공동체 내에서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처리되거나 혹은 발견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lt;/p&gt;
&lt;p&gt;&apos;이방인 중에서라도 없는 것&apos;으로 정의되고 있는 이 사건의 핵심은 정말 황당한 사실이다. 누군가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였다는 것이다.&lt;/p&gt;
&lt;p&gt;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이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란성의 경중이 아니다.&amp;nbsp;&amp;nbsp;이 황당한 사건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심각성은 이런 사건이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진 일임에도&amp;nbsp;불구하고, 모두들 그냥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amp;nbsp; 그냥 눈감고 봐준것인지 혹은 진짜로 문제성이 있다는 사실 조차 감지하지 못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 당사자가 교회 내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거나 혹은 굉장히 신령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다는 것이다.&lt;/p&gt;
&lt;p&gt;즉 &apos;저분이 저런 일을 했을때는 다 나름 이유가 있을꺼야~&apos;&amp;nbsp; &apos;저렇게 신령한 믿음을 소유한 분이 그렇다한다면 뭔가 깊은 의도가 있거나 작은 실수이겠지~&apos;&amp;nbsp; &apos;어떻게 감히 저분을 우리가&amp;nbsp;어떻다 저렇다 할수있단 말인가~&apos;&lt;/p&gt;
&lt;p&gt;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냥 묻혀&amp;nbsp;지나쳤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런 이유로 대부분&amp;nbsp;묻어버리고 쉬쉬하고 있기&amp;nbsp;때문이다.&amp;nbsp;용기있게 칼을 들여대는 개혁을 시도할라치면 너무나 거대한 (어디다 손을 대야 할지모르는) 담합 앞에 무너져 내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바울의&amp;nbsp;고린도&amp;nbsp;교회의&amp;nbsp;개혁은&amp;nbsp;표면적으로 드러난 &apos;이방인 중에서라도 없는 음란 사건&apos;&amp;nbsp;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라, 왜 이런 사건이 은폐될 수 밖에 없고 또한 마치 아무일도 아니란듯이 넘어 가고 있는가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개입인 것이다.&amp;nbsp; 바울은 여기서 영적 폐해를 지적한다.&amp;nbsp;&amp;nbsp;영적인 열광과 관심이 현실을 가리워 버리고 있다고...&amp;nbsp; 또한 진정한 영성은&amp;nbsp;영적 세계를 잘 보고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해결되는&amp;nbsp;것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amp;nbsp;헤아릴때 비로소 건강한 영성이 세워져 간다는 것을 지적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처럼 &apos;영적이다 혹은 영성&apos;에 대한 관심은 때때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릇된 렌즈 역할을 할때가 있다.&lt;/p&gt;
&lt;p&gt;다른&amp;nbsp;사람들은 다&amp;nbsp;보고 판단하는 사안에 있어서, 자칭 영적 세계를 보고&amp;nbsp;헤아린다는&amp;nbsp;사람들이 남들 다보는 것들에 대해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amp;nbsp; 건강하고 균형잡힌 상식을 뛰어넘은 영성이어야 의미가 있음이다.&amp;nbsp; 건전한 상식 선에 못미치는 탁월한 영성이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lt;font size=&quot;2&quot;&gt;1. 첫번째&amp;nbsp;영적 현실 - 정작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조차 헷갈리는 상황...&lt;/font&gt;&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파송받은 제자들이 맞닥뜨릴수 밖에 없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lt;/p&gt;
&lt;p&gt;행여라도 성령께서&amp;nbsp;그들이 가야 할 길에 만날 모든 대적을&amp;nbsp;평토장하신듯 탄탄대로가 기다릴것이라 기대한다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gt;우리 주위에는 이런 영웅적인 간증들이 너무 많고 흔한 까닭에 어떤 착각 혹은 최면 같은 것에 걸린듯하다.&amp;nbsp; 주의 이름으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며, 우리네 삶은 축복받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번듯한 미래가 보장되어&amp;nbsp;있다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꼭 그렇지는 않다. 그럴수는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lt;/p&gt;
&lt;p&gt;특별한 것이 대중적이며 보편적이라 여겨서는 곤란하다.&amp;nbsp;철학적 오류를 들먹이지&amp;nbsp; 않더라도 쉽게 수긍할수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먹혀들지 않는다.&amp;nbsp;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 들이기보다는 뭔가 섣부른 기대를 안고 접근한다.&amp;nbsp;결과적으로 승리하신 주님을 깃발 삼다보니, 그 과정에서 곤란을 당하신 현실이&amp;nbsp;희석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네 파송받은 삶에 있어 피치 못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현실이라는 과정이다.&lt;/p&gt;
&lt;p&gt;다행스러운 것은 현실이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라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될뿐, 어렵고 고단하고 지지부진한 현실은 우리가 겪어야 할 몫이다.&lt;/p&gt;
&lt;p&gt;예수님은 온전히&amp;nbsp;몫을 채우셨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과 번민 그리고 좌절로써&amp;nbsp;온전히 경험하셨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지대한 연구꺼리가 될 정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기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했다.&lt;/p&gt;
&lt;p&gt;바울과 그의 서신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까지 예수에 대한 이해는 주로&amp;nbsp;십자가에 한정되었다.&amp;nbsp;&amp;nbsp;즉 다시 말하면, 초기 약 60년경까지 예수에 대한 이해와 복음의 이해는 그분&amp;nbsp;공생애의 정점이라 할수있는 십자가의 은총과 그 해석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amp;nbsp; 율법과 복음의 긴장 속에서 십자가의 은총이 어떠하며 그 구속의 역사가 가진 지난한 의미들을 해석하는 것에 온통 관심이 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한 복음의 해석 과정에서 어떤 반성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복음서의 출현이라 할수있다.&lt;/p&gt;
&lt;p&gt;특별히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복음서의 출현은 당시로서 아주&amp;nbsp;획기적인 복음의 해석이었다.&amp;nbsp; 크게 두가지&amp;nbsp;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구전의 복음 형태가 글로 기록된 형태로 정착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복음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두가지 사실을 요약해서 정리하면&amp;nbsp;대체로 다음과 같다.&lt;/p&gt;
&lt;p&gt;즉,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근 3~40년 동안 복음의 형태는 기록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과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존한 상태였기에,&amp;nbsp;&amp;nbsp;얼굴을 맞댄 상태에서&amp;nbsp;행해지는 설교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을 접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언급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것에 대한 강력한 기대들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받은 탁월한 신학자이자 선교가였던 바울의 활동과 저술은 복음의 깊이와 해석에 있어 상당한 매력을 동시에 제공하였기에 별다른 예수님의 생애나 당시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거나 보관하고자하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변화가 왔다. 목격한 증인들의 연이은 부고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해석이 달리 이해될수있다는&amp;nbsp;깨닫음 그리고&amp;nbsp;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amp;nbsp;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amp;nbsp; 또한 바울도&amp;nbsp;종종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한계를&amp;nbsp;드러냈다.&amp;nbsp;&amp;nbsp;사역 초기부터&amp;nbsp;끊임없이 공격받았던 사도적 자질에 대한 그의 변명은 때때로 절박할 정도였다.&amp;nbsp;&amp;nbsp;많은 사람들이 예수 생전에 직접적인 가르침과 교통이 없다는 점을 들어&amp;nbsp;공격할때마다, 그는&amp;nbsp;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특한 사도적 위임에 대해&amp;nbsp;설명하였다. 다메섹 길에서의 그&amp;nbsp;잊을 수 없는 부르심과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비밀스러운 3년간의 행보가 어떻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시켰는가를 그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변명의 기회를 이용하여&amp;nbsp;적극 변호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사도로서 부족함은 없지만,&amp;nbsp;한켠의 결핍(예수 생전의 교통과 가르침)이 가져오는 약점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한다.&amp;nbsp; 고린도전서 13:12에서 &apos;지금은 내가 일부분만을&amp;nbsp;알고있습니다.&amp;nbsp; 그러나 그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것입니다&apos;라고...&lt;/p&gt;
&lt;p&gt;이런&amp;nbsp;신학적 반성과 당시의 분위기로 인하여 서서히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남겨야 할&amp;nbsp;필요성이 여러 복음서로 드러난 것이다. 그중에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의 복음서는 아주 중요한&amp;nbsp;당시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것이 바로 복음의 형태가 다른 그릇에 담겨야 할 절박함과 복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신학적 반성이었다.&lt;/p&gt;
&lt;p&gt;교회 구성원의 상당수가&amp;nbsp;예수님의 생전을&amp;nbsp;목격하지 못했고, 구전에 의존한 복음의 가르침으로 인해 복음의 내용과 범위가 주님 사역의 최종 결과물인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집중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이원론적 신앙 행태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지않아도&amp;nbsp;당대의 지배적인 철학적 기반으로 플라톤주의가 성행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플라톤 철학이 유용한 측면이 많았기&amp;nbsp;때문에 신앙 생활이 머리 따로 가슴 따로의 경향성을 가질수밖에 없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amp;lt;플라톤주의&amp;nbsp;: 육체와 영혼을 이분하여 영혼과 정신적인 면을 존중하는 견해를 플라톤주의라고 부른다.&amp;nbsp; 플라톤은 이데아설을 제창하였는데, 이데아는 비물질적이며 영원하며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된 실재로 보았다. 이에 반해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이며 상대적이고 경험적이므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정립하였다.&amp;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초대교회는 이러한 신앙적 위기 앞에&amp;nbsp;복음서라고 하는 성령의&amp;nbsp;치료 처방전을 부여받은 것이라 할수있다.&lt;/p&gt;
&lt;p&gt;특히 마가복음서는 복음서의 첫글에서부터&amp;nbsp;복음의 그릇이 바뀌었음에 대한 선언(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다)으로 시작한다.&amp;nbsp; 또한 복음의 범주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복음이라고 재설정하고 있는 것이다.&amp;nbsp; 이러한 복음서의 도전을 통하여 이제 예수님의 몸짓 하나, 자그마한 행동으로 빚어지는 사건 하나 그리고 그분의 세세한 가르침 모두가 복음임을 선포하는 것이다.&lt;/p&gt;
&lt;p&gt;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별로 새로울것&amp;nbsp;없어 보이지만,&amp;nbsp;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도전이며 개혁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과정을 통하여 되찾은 소중한 것이 바로 현실, 영적 현실 -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3년의 공생애가 비로소 의미있게 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제 예수님이 경험하신 그 모든것이 복음이다.&lt;/p&gt;
&lt;p&gt;예수님이 아파하시고 목말라 하시고 불편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여행을 감당하신 모든 과정이 의미있는 복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십자가 죽음, 부활과 동등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amp;nbsp;복음에 대한 재발견이었다.&lt;/p&gt;
&lt;p&gt;사실상 우리는 결과 중심적인 영광의 신학에 환호하며 관심이 집중되기 쉽다. 잠시 잠깐의 고난이 있었다지만 이내 십자가의 영광에 가리워버림으로 말미암아, 과정은&amp;nbsp;희미해지고 결과는 더 선명해진 영광의 결과가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워 쉽사리 도취된 것이다.&amp;nbsp; 그러다보니 어려움이 오면 당황하게 되고, 부정하게 되고, 넘어지기 쉬워지는&amp;nbsp;것이다.&lt;/p&gt;
&lt;p&gt;그러므로 복음서의 과정과 현실의 재발견은 이러한 편향된 신앙을 바로 잡는&amp;nbsp;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는 자칫 영광의 신학에 빠져서, 파송받은 제자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현실-우리 주님의 경험하신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곤란하다.&lt;/p&gt;
&lt;p&gt;오히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우리의 영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함으로 그 가운데&amp;nbsp;피할길을 열어두신 주님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lt;/p&gt;
&lt;p&gt;이것이 바로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파송받은 제자가 맞이하는 영적 현실은 곧 우리도 만나게 될 상황이거나 지금 경험하는 상황일 것이다.&amp;nbsp; 드러나는 양상이 좀 다를뿐,&amp;nbsp;본질은 같음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4&amp;nbsp;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amp;nbsp;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lt;/p&gt;
&lt;p&gt;25&amp;nbsp;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lt;/p&gt;
&lt;p&gt;26&amp;nbsp;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lt;/p&gt;
&lt;p&gt;27&amp;nbsp;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본문에서 이르시는 첫번째 영적 현실은 &apos;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고, 그 집사람들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현실&apos;이다.&lt;/p&gt;
&lt;p&gt;&amp;nbsp;집주인이신 예수를 바알세불이라 지칭하며 왜곡했던 이들의 정체는 가히 카멜레온과도 같은 무리들이다. 서기관과 바리새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이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amp;nbsp; 무엇이든지 조작할수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amp;nbsp; 정치 그룹 중에서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기때문에 유능하게 상황을 만들어내고 계략을 추진력있게 진행시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처럼, 이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선동하고 있다.&lt;/p&gt;
&lt;p&gt;바알세불, 즉 예수가 귀신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amp;nbsp;&amp;nbsp;그래서 이런 저런 기적을 행하는 일련의 일들이 매우 위험하고 벼랑끝으로 몰고가는 유혹이라는 것이다.&amp;nbsp; 그래서 순진하게 예수를 따라가다가는 멸망의 길로 들어설수있음에 대한 선의의 경고를 발동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다.&amp;nbsp; 유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악한 자의 유혹에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들은 전형적인&amp;nbsp;정치꾼들이다.&amp;nbsp; 군중 심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할줄 아는 사람들이다.&amp;nbsp; 돌아가는 형세 변화에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형세를 뒤집거나 조작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amp;nbsp; 그러므로 아주 느긋하다.&amp;nbsp; 바쁘게 조급함으로 일을 망치지 않는다.&amp;nbsp;&amp;nbsp;아마추어가 아니라 진정한 프로들이다.&lt;/p&gt;
&lt;p&gt;그러므로 안색도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참말처럼&amp;nbsp;퍼뜨린다.&amp;nbsp; 그러나 이들은 집요하다.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위협할 소지가 있거나 자신들의 범주내에서 벗어남으로 통제 불가능해질것을 예상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집요하게 방해물을 제거해 간다. 서둘지 않고 착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두번의 시도가 그들의 계략대로 먹혀들지&amp;nbsp;않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고 좀더 적극적이고 치밀하게 다음 상황을&amp;nbsp;준비한다.&lt;/p&gt;
&lt;p&gt;군중들의 대다수가 지금 자신들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반응하며 환호한다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amp;nbsp;&amp;nbsp;언제든지 형세가 바뀌면 무리들의 반응은 급변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대처할 만큼 지혜롭고&amp;nbsp;대응수단이 다양하다.&amp;nbsp; 왜냐하면 기득권이기 때문이다.&amp;nbsp;갖은 모략을 적용할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우월적 지위에 있음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문에서는&amp;nbsp;예수님을 단지 바알세불이라고 몰아세우며 밀어붙이는 정도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그들은 예수를 결국 무리들에게서 유리시키고, 추종자들을 해산시켰으며, 예수를 제3자의 손을 빌어 당시의 가장 무거운&amp;nbsp;죄, 반역혐의로 십자가 사형을&amp;nbsp;당하도록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진행시킴으로 소기의 목적을 깨끗하고 완벽하게&amp;nbsp;마무리했음을&amp;nbsp;안다.&amp;nbsp; 또한&amp;nbsp;자칫 뒷소문으로 말미암아 탈 날것을 대비하여 돈으로 사람들을 완벽하게 매수하여 그럴듯한 소문을 퍼뜨리게&amp;nbsp;하는 깔끔한 뒷처리도 돋보였음을 알고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께서&amp;nbsp;언급하시는 이 현실은 순수함이&amp;nbsp;왜곡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됨으로 난처해지는 경우의 수가&amp;nbsp;너무나 많은 현실이다.&lt;/p&gt;
&lt;p&gt;우리가 복음의&amp;nbsp;순수함과 열정을 품고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 진실하게 살고자&amp;nbsp;하더라도, 세상은 이 진심을 몰라주는 세대임을 말씀하심이다. 이 세대의 완악함은 그 당신의 세대와 크게 별단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에 들지않거나 자신들의 입장과 다를경우엔 번뜩이는 이해득실만이 평가의 잣대를 형성할 따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고 고귀한 희생을 감추어버릴 것이며, 왜곡시킴으로 비꼴것이다.&lt;/p&gt;
&lt;p&gt;그것도 단순히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중력있게 지속적이며, 적당히 괴롭히다 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살시키며 침묵시킬 정도로 잔인하다.&lt;/p&gt;
&lt;p&gt;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amp;nbsp;흐트림으로&amp;nbsp;세상과 적당하게 동화될것을 요구함으로 안위를 약속한다.&amp;nbsp; 사실 적당히 잘 믿으면 얼마나&amp;nbsp;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듣겠는가!&amp;nbsp;&amp;nbsp;세상의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첨예한 믿음의 삶을 내려놓고, 적당히&amp;nbsp;교회 출석하며 믿음 생활하는&amp;nbsp;죽은 양으로의 삶은&amp;nbsp;&amp;nbsp;고달프지도 그리고 번거럽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amp;nbsp; 앞서 살펴본것처럼, 이리 가운데 보냄받은 양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한 에녹의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의지함으로 주의를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앞에 부단히 섬으로 순결한 양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파송받은 제자의 치열한 삶을 포기하거나 살짝 내려놓는다면... 참 쉬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또한 이러한 유혹은 단회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달콤한 제안들로 다가온다.&amp;nbsp; 특히 파송받은 제자의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때면 영락없이 타협의 손길이 우리의 심령을 파고든다.&amp;nbsp;&amp;nbsp;제자로서의 삶의 여정 가운데 뚜렷한 실적이 없거나 애써 진행하고 기도했던 일이 어긋나 버린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amp;nbsp; 허탈한&amp;nbsp;심정 가눌길 없어 하는 순간, &apos;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apos;하는 큰 울림이 우리를 짓누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승리하셨고 역사를 이루시는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amp;nbsp;주위에서는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부흥이 일어나지만,&amp;nbsp;내 앞길엔 그저 일이 더 꼬이기만하고&amp;nbsp;무엇하나 속시원한 열매가 없음을 확인하며 실망하는 순간... 우리는 갈등한다.&amp;nbsp; &apos;제대로&amp;nbsp;살고있는 것이 맞는가?&apos;싶고, &apos;뭐 이래?&apos;라는 말이 불쑥&amp;nbsp;나온다.&amp;nbsp; &apos;과연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기나 하신거야?&apos;싶고, &apos;혹시 내가 소명을 잘못 확인한것은 아닌가?&apos;하여 방황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amp;nbsp; &apos;제자가 그&amp;nbsp;선생보다 ,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다&apos;...&lt;/p&gt;
&lt;p&gt;무슨 말인가?&amp;nbsp;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주목하기를&amp;nbsp;원하시는 어떤&amp;nbsp;처방전이 있다.&amp;nbsp;&amp;nbsp;현실에 휘둘린 자신의 삶이 복음이 되게하신 삶으로의 초대라고 표현할수있다.&amp;nbsp; 즉, 현실의 암담하고 두려운 상황을&amp;nbsp;만들어내고 조작해 낸 세력이 원하고 기대하는&amp;nbsp;바대로&amp;nbsp;&amp;nbsp;반응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담대해 질것을 요청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amp;lt;이 부분이 조금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듣고나면 다 알고 있었던거네...할 것이다.&amp;nbsp; 잘 이해하고 있어야&amp;nbsp;&lt;strong&gt;우리의&amp;nbsp;찌들린 현실의 삶이 복음이 되고 소망이 되며 진실로&amp;nbsp;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lt;/strong&gt;&amp;nbsp;고백할 수 있음이다&amp;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amp;nbsp;&lt;/p&gt;
&lt;p&gt;세상의 질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amp;nbsp; 일반적이다.&amp;nbsp; 특별한 이변이 없는한, 이 설정은 유지되어야 하고 유지될것이다.&amp;nbsp; 이 관계 속에서 도덕이 형성되고&amp;nbsp;사회 위계 질서가 확립된다.&amp;nbsp;사회는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하여 계약 관계가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효율적이며 질서 잡힌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이다.&amp;nbsp; 이런 질서가 때로는 시민혁명이나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새롭게 정립되기도 하지만, 그 모습과 양상이 조금 바뀔뿐 그 토대는 여전히 새로운 신분과 종속이 그 기반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세상의 기본 질서를 유지 혹은 강제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이다.&amp;nbsp; 어디에나 있다.&lt;/p&gt;
&lt;p&gt;사회 조직 속에도 있고, 무형의 학문 세계에도 있다.&amp;nbsp;&amp;nbsp;그 사회나 조직 내에서 텃밭을 일구어낸 공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형성된다.&amp;nbsp; 좋게 말하면 질서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이 질서를 반하여&amp;nbsp;도전하는&amp;nbsp;&amp;nbsp;것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기득권을 형성하는 이들의 반발이 나타나게 된다.&amp;nbsp;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고 새로운 질서가 짜여질때까지 한동안 시끄러워지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텃밭에&amp;nbsp;완전히 이질적인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반발을&amp;nbsp;부를 수 밖에 없다.&lt;/p&gt;
&lt;p&gt;특히 유대인들의 철옹성과 같은 질서와 규범 그리고 영적인 권세까지 헤아린다면 가히 그 텃세는 대단할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실 가운데로 들어 서셨다.&amp;nbsp;우리가 파송받아 살아갈 현실도 별반 다를바 없다. 모양새만 다를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세상의 잘 짜여진 조직속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신다. 그것이 &apos;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과 같다&apos;는 것이다.&amp;nbsp; 종속이 아닌 하나됨, 일치를 말씀하신다.&amp;nbsp;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운 가치와 질서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amp;nbsp; 전혀 낯선 선포라고 할수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된다는 것일까?&amp;nbsp; 어떻게 이것이&amp;nbsp;이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정신이나&amp;nbsp;기득권의 반발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인가?&amp;nbsp; 달리 표현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모습이 복음이 된다는 것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것은 예수님의 실패가 있고, 실패의 와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기 때문이다.&lt;/p&gt;
&lt;p&gt;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동안 그리고 마지막 생애의 모습에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실패하는 삶을&amp;nbsp;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amp;nbsp; 3년동안&amp;nbsp;공들였던 제자들은 배반하여 팔아넘기고,&amp;nbsp;자신을 저주하며 돌아서며 대부분은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amp;nbsp; 그렇게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모든 일들이 하나도 제대로 된것이 없어 보이며, 그 자신도 당시의 가장 극형이랄수있는 십자가에서 희생당하고 말았다.&lt;/p&gt;
&lt;p&gt;유대의 기득권층이라 할수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꾸준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연합하여 예수님을 공격했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을 것이다.&amp;nbsp; 예수님은 점점 더 고립되었으며 종국에는 작은 동산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은&amp;nbsp;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amp;nbsp;실패라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amp;nbsp;자신과 닮은 실패의 삶이 의미있다 선포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즉,&amp;nbsp;좋은 결과물이 없는 삶이며 그&amp;nbsp;과정과 고비마다 눈물과 배신의 쓰라림과 허탈감이 있다하더라도 낙심치 않고 두려워하지&amp;nbsp;않고&amp;nbsp;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와 하나되어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의 삶이 비록 비참하고 쓰라리고 실패의 현장 같아 보이지만,&amp;nbsp;잊어서는 안될것이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거대한 열심이 녹아드는 발판이었음을 비로소 우리는 고백할수있기 때문이다.&amp;nbsp; 예수님의&amp;nbsp;그 고달픈 공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없었다면 구속의 영광도 없음임을&amp;nbsp;기억해야만 한다.&amp;nbsp; 고난없이 영광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할진데 낙심치 말일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나됨과 일치가 있기에 우리의 현실은 복음이 되는 것이다.&lt;/p&gt;
&lt;p&gt;비록&amp;nbsp;나의 삶의 현장이 고달프고 힘겹다 하더라도 그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시며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 있음을 볼수있어야 한다.&amp;nbsp;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힘주어 외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amp;nbsp;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무언가를 -&amp;nbsp;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협력하여 아름다운&amp;nbsp;열매를&amp;nbsp;맺어 가시는 동역의 순간임을 놓치지 않는것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것이 우리의 고단한&amp;nbsp;삶을 지탱해주는 소망인것이다.&amp;nbsp; 우리를 홀로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 현장인 것이다.&amp;nbsp;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amp;nbsp;이러한 연합과&amp;nbsp;일치의 고백이 살아있을때 진정한&amp;nbsp;빛을&amp;nbsp;발하는 것이다.&amp;nbsp; 그저 신학적 교리 설명으로 삼위의 하나되심을 아무리 설명한들, 그것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개념일뿐이다.&amp;nbsp;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과 이 땅을&amp;nbsp;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나와&amp;nbsp;연합하심을 고백할때 비로서&amp;nbsp;하나됨의 역사 현장이 복음의 장이구나 확신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의&amp;nbsp;고단하고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때론 실패로 보이는 그 일상의 고루함이 복음이 되는&amp;nbsp;이유가 바로 이것이다.&lt;/p&gt;
&lt;p&gt;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때는 그저 낭비같고 꼭 저렇게 해야만 할까싶은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 너머에 진정한 실속을 차리시며 열매를 맺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함께 하기에&amp;nbsp;이 삶이 복음인것이다.&amp;nbsp;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숨 한자락 그리고 몸짓 하나 하나가&amp;nbsp;복음이 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복음의 개념을 조금더 이해해 보자.&lt;/p&gt;
&lt;p&gt;이렇게 생각할수있다.&amp;nbsp;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 진짜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는가?하는 점이다.&amp;nbsp; 대답은&amp;nbsp;그렇게 자주 종종 역사하셨다.&lt;/p&gt;
&lt;p&gt;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과&amp;nbsp;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갈때, 이스라엘은 부족하고 완고했었다.&amp;nbsp; 때때로 믿음이 너무 없어서&amp;nbsp;하나님의 뜻이 방해될때도 있었다. 그 순간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너졌을까하는 점이다.&amp;nbsp;&amp;nbsp;표면적으로 보면 마구마구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고 허무해진것 처럼 보이기도 하다.&amp;nbsp; 그러나 잘 들여다보고 한참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수있다.&amp;nbsp; 일이 틀어진것 같지만, 진정으로 승리하고 실속을 차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amp;nbsp; 하나님께서 비록 믿음이 형편없이 부족한 이스라엘의 어떤 누구라 하더라도 연합하여 일하시는 그 열심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시며,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를&amp;nbsp; 들면, 대표적으로&amp;nbsp;사사 삼손의 경우가 그러하다.&lt;/p&gt;
&lt;p&gt;사사기에 삼손 만큼 하나님의 임재가 빈번한 경우가 없다.&amp;nbsp; 다른 몇 사사들에게 겨우 한번 있을까말까한 하나님의 임재가 세번씩이나 언급되지만, 그때마다 삼손은 자기 욕심과 혈기 그리고 방탕함으로 번번히 일을&amp;nbsp;망치고 만다.&amp;nbsp;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실속없이 실패하신것 같아 보인다.&amp;nbsp;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은&amp;nbsp;이스라엘의 대적을 혼내시고 계시며 제거하시는&amp;nbsp;결과물들이 있음을&amp;nbsp;알수있다. 즉&amp;nbsp;열심히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이심을 그 망나니 같은 삼손과 그 절박한 상황 중에서도&amp;nbsp;볼수있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현실을 정리하면 이렇게 요약된다.&lt;/p&gt;
&lt;p&gt;눈앞의 현실은 막막하다.&amp;nbsp; 세상의 질서와 기득권은 막강하다.&amp;nbsp; 그 텃세는 심하다.&amp;nbsp; 그래서 종종 너무나 빈번하게 우리의 파송받은 삶이 무기력해지며 실패를 경험하곤 한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해 보인다. 실제 우리의 현실의 삶도 비슷하다.&amp;nbsp; 때론 재미없기까지 하다. 때때론 소명에 대한 의심이 들만큼 열매가 없거나 고생스럽기까지 하다.&amp;nbsp; 그러나 성경은 이런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실패의 현장을 복음이라 부른다. 그러시면서 예수님도 우리의 형편없는 삶을 보시며 괜찮다하신다.&amp;nbsp; 나도 그랬는데 뭘그래?하신다. 그러면서 이 현실을 복음의 현장으로 초대하신다.&amp;nbsp;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임을 선포하신다.&lt;/p&gt;
&lt;p&gt;왜냐고 했더니, 내가 실패하고 있는 그 현장 가운데&amp;nbsp;우리와 하나 되시어 동역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amp;nbsp;분명히 열매를 거두시고 계시기 때문이라 말씀하신다.&lt;/p&gt;
&lt;p&gt;삼위일체가 그래서 의미있고,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가 그래서 의미있다 말씀이다. 왜냐면&amp;nbsp;겉으로 보기엔 실패한것 같지만, 정작 속으로 실속 차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기회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바울은&amp;nbsp;그래서 고백한다. 약할때&amp;nbsp;진정 강하노라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lt;font size=&quot;2&quot;&gt;2.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quot;겹쳐진&quot; 영적 현실&lt;/font&gt;&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8&amp;nbsp;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lt;/p&gt;
&lt;p&gt;29&amp;nbsp;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lt;/p&gt;
&lt;p&gt;30&amp;nbsp;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lt;/p&gt;
&lt;p&gt;31&amp;nbsp;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2&amp;nbsp;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lt;/p&gt;
&lt;p&gt;33&amp;nbsp;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amp;nbsp;첫번째 현실을 다루실때는 우리 삶의 이원론적 구분을 모호하게 하셨다.&amp;nbsp; 그러므로&amp;nbsp;&lt;strong&gt;진정한 영적인 삶은 육적인 차원위에 세워지는 삶임을 강조하셨다&lt;/strong&gt;.&amp;nbsp; 답답하면서도 힘겨워 보이는 육신의 고달픈&amp;nbsp;현실이&amp;nbsp;다름아닌 지극히 영적인 복음의 삶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lt;/p&gt;
&lt;p&gt;그러나&amp;nbsp;이어지는&amp;nbsp;28절부터는 다시금 그 경계를 부각시킨다. &apos;몸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했을 제자들과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일 것이다.&amp;nbsp;&lt;/p&gt;
&lt;p&gt;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amp;nbsp;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amp;nbsp; 두려워하라&apos;고&amp;nbsp;말씀하신다. 어떻게보면 애써&amp;nbsp;육신의 삶이 곧 영적인 삶이며 복음이므로 육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방향을 힘들게 돌리셨다가억지로 돌리셨다가 곧바로 원상태로&amp;nbsp;회복하심과&amp;nbsp;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러한 주님의 의도는 29~31절의 참새 이야기를 통해 헤아려진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참새 두마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사먹을 수있는 가장 손쉬운 먹거리였다.&lt;/font&gt; 두 마리의 가격으로 지불되는&amp;nbsp;한&amp;nbsp;앗사리온은 동전&amp;nbsp;중에서 가장&amp;nbsp;작고 값어치 없는 화폐 단위이었다. 지금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에도 미치지 않는 노동의 품삯에 해당한다.&amp;nbsp; 또한 누가복음 12:6에서는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의 참새를 구입할&amp;nbsp;수 있다고 언급한다.&amp;nbsp; 그 말은 대량 구입시 선뜻 덤으로 여러 마리를 끼워주기도 했다는&amp;nbsp;말일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즉, 참새 이야기를&amp;nbsp;통해서 주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lt;strong&gt;육의 현실이 복음적 가치를 가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amp;nbsp;빛나게 하는 과정은 쉽지 않음에 대하여... 그리고 빛나는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과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함에 대한 것이다.&lt;/strong&gt;&lt;/p&gt;
&lt;p&gt;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네 삶의 고달픔이&amp;nbsp;꾸준히 지속적일때&amp;nbsp;일어나는 현상을 주님은 충분히 알고 있다.&amp;nbsp; 그것은 다름아니라,&amp;nbsp;33절의 &apos;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사태&apos;이다.&amp;nbsp;&amp;nbsp;&apos;사람들 앞에서&apos;라는 표현이 가진 충분한 위험을 주님은 알고 계신다. 눈에 띄기&amp;nbsp;쉽고 그래서 너무나 선명하게 비교 대조되며, 자신의 처지와 타인의 처지가&amp;nbsp;내면의 가치보다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amp;nbsp;것에 의해 순식간에&amp;nbsp;평가되고 차별당하는&amp;nbsp;현실의 무게를 예수님은 헤아리심이다.&lt;/p&gt;
&lt;p&gt;무게가 점점 무거워질때, 언젠가 버티는 것을 중단해 버릴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제한적인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새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힘겨운 현실, 육신의 고달픈 무게가 복음의 참된 현장이며&amp;nbsp;가치있는 삶임을 설득하시려는 것이다.&amp;nbsp;사람들은 힘겨워도&amp;nbsp;동기만 적절히 부여되면 견딜수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참새 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은&amp;nbsp;시장에서 형성된 현실적 가격이다.&amp;nbsp; 시장은 나름 수요와 공급에 의해(요즘과 같은 투기세력이 없다고&amp;nbsp;생각한다면) 잘 돌아간다.&amp;nbsp;당시엔 냉동 창고와 같은 저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먹거리에 있어서는 더더욱 정직한 가격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lt;/p&gt;
&lt;p&gt;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참새는 이러한 빈민층들의 중요한 먹거리였다. 값싸게 덤까지 주는 고기는 참새밖에 없었을 것이다. 흔하고 잡기 쉬웠기 때문일것이다. 흔하긴한데 잡기 어렵다면 당연 가격은 올라갈것이지만, 참새는 흔하기도하고 잡기도 쉬운 먹거리였음이 분명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수님은 이렇게 흔하고 가치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 - 그것이 덤으로 끼워준 날개부러진 참새라 할찌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잡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lt;/p&gt;
&lt;p&gt;너무나 쉽게 그리고 많이 잡히는 참새를 익히 알고있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amp;nbsp;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 여기는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 혹은 관점을 달리한 접근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lt;/p&gt;
&lt;p&gt;만일 주님께서 구하기 정말 어려운 상어 지너러미(삭스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그럴수있겠지 생각했겠지만, 참새 이야기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잘 알고있으며 살아가면서 늘 주변에서 접하는 참새 가격과 포획의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수긍하기엔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와 세번째 현실에서 주님께서 주목하시며 노리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lt;/p&gt;
&lt;p&gt;우리네 삶은 히말라야 등정 중에 겪는 어려움에 대한 논의는 극소수의 모험가 이야기이다.&amp;nbsp; 사실 등산은 일년에 한번 동네 앞산에 올라갈까말까지만, 맘속으론 늘 히말라야 등반을 꿈꾼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다.&lt;/p&gt;
&lt;p&gt;우리의 삶은 히말라야 등정을 하고 고급식당에 삭스핀요리를 즐기는 일상을 보내지 않는다.&amp;nbsp; 그건 어쩌다가 특별한 날에 작심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동네 가게나 편의점에서 쌀을 구입하고 갈치와&amp;nbsp;샴퓨를 구입하며 몇푼 되지 않는&amp;nbsp;가격에 깜짝 놀라며 두개 사려다가 하나를 빼놓고 계산하는 것이 그냥 일상의 모습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전쟁이 나거나 어떤 특별한 사명에 목숨 걸어 영웅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주로 영화관 스크린에서만 일어나는 그들만의 일이고, 나의 삶은 자녀의 건강과 영어 수학 국어 ... 공부와 시험에 덩달아 녹초가 되는 삶이다. 아프기라도 하면 밤새 열이 나서 콜록거리거나 몸을 긁어대는 아이와 함께 긴밤을 새우고 다음날 비몽사몽 헤롱헤롱하면서도 출근해야 하는 삶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가장 흔히 겪고 많은 시간을 맞주하는 일상의 당연해 보이는 일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길임을 들려주고픈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왜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할수밖에 업는 것일까?&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말씀을 받고 있는 이들은 주님의 권능을 덧입고 소명감에 불타는 제자들이며, 주님께서 &apos;이리떼 가운데 보낸 양&apos;과 같이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그 사람들이... 왜 주님을 결국 부인해 버리는 것일까? 그 결과 예수님께서도 실망하셔서 심판날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휘젓고 만다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에 우리는 놀랄수밖에 없지 않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왜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가?&amp;nbsp; 과연 어떤 모습의 삶이 주님을 부인하는 삶이란 것일까?&amp;nbsp; 베드로처럼 세번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한다는 것을 의미할까?&lt;/p&gt;
&lt;p&gt;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그저 당황스럽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로 부인하며 실수했지만, 그렇다고 베드로가&amp;nbsp;예수님의 버림을 당했는가?&amp;nbsp; 오히려 회복됨으로 초대교회의 든든한 사도로써 죽기까지 충성하며 본이 되고 든든한 기둥의 역할을 감당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인생을 살면서 겪는 뜻하지 않은 실수나 실책을 문제 삼으신다는 것은 아닌것 같다.&lt;/p&gt;
&lt;p&gt;이러한 것이 중하다면 중하지만, 주님께서는 회개와 애통을 통해 그러한 잘못은 능히 충분히 용서해주심을 여러차례 언급하셨고 길을 열어 두셨다.&amp;nbsp; 만일 그런일로 주님의 부인하심의 대상이 된다면 구원받을&amp;nbsp;인생이 없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본문의 참새 이야기가 의도하는 것은 흔하고 지속적인 일들에 반응하고 생각하며 다시한번 마음을 모아가는 일들과 관계있음이다.&lt;/strong&gt;&amp;nbsp; 즉, 일상의 삶에서 겪는 지속적인 고통과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주님의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고 소명감을 회복하며 끝까지 양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이다.&lt;/p&gt;
&lt;p&gt;그렇다면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amp;nbsp; 마치 끼니마다&amp;nbsp;장에 나가 참새 두마리를 한 앗사리온 사와서 털뽑고 내장 발가내어 구워먹는&amp;nbsp;일과 같은 일들은 무엇일까?&lt;/p&gt;
&lt;p&gt;또한 그렇게 흔하고 자주 접하기 때문에&amp;nbsp;&apos;설마 이런 일에 하나님의 섭리 역사나 큰 의미&apos;등과 같은 뜻히 있으리라고 예상치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무엇이 우리를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으로 내몰고 있는가...&lt;/p&gt;
&lt;p&gt;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같은 자녀들을 어린이집이나 누군가에게 맡기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돈벌기 여념없이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amp;nbsp; 어쩌면 그것이 개인적 취향일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무서운 현실이기 때문이다.&amp;nbsp;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 말이 가진 무서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청은 요즘으로 따지면 경찰청이거나 검찰청이다. 일전에 경찰청에서 편지가 날아왔다.&amp;nbsp;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뭔잘못을 했나? 혹시 또 교통위반해서 벌금내라는 것은 아닌가해서 짧은 순간이지만 겁났다. ^^*&amp;nbsp; 뜯어보니 면허증 갱신 기간 안내문이어서 곧바로 대수롭지 않은듯 휙 던져버렸지만... 혹시라도 그것이 출두명령이거나 벌금고지서였다면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무섭다. 애써&amp;nbsp;노동하지 않으면 당장 먹거리와&amp;nbsp;건강의 위협과 긴장감은 극에 다다른다.&lt;/p&gt;
&lt;p&gt;이런 고달픈&amp;nbsp;현실은 누구나에게 적용된다.&amp;nbsp;&amp;nbsp;그렇기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살벌하다.&amp;nbsp; 더구나 이웃이 부모를 잘만난 덕분에 혹은 직장이 번듯해서 등등의 이유로 별수고하지 않아도&amp;nbsp;잘먹고 잘사는 모습을 볼라치면, 비교에 의한 열등감이 생겨나고 경쟁과 업적을 위해 더 고달픈 삶에 몰두하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누군가가 중요한 일과 바쁜 일을 구별하고 중요한 일에 투자하라고 멋진 말을 하지만, 당장 먹고 살기 바쁘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일뿐이다.&amp;nbsp;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세상을 초월한듯 찬송하지만, 당장 뒤돌아서면&amp;nbsp;좀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죽을&amp;nbsp;힘을 다해 준비하고 경쟁한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지만&amp;nbsp;남과의 경쟁에서 한발 앞서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국과 같은 경제적으로나 정치 교육 사회적으로&amp;nbsp;안정되지 못한&amp;nbsp;상태에의 경쟁은 가히 무한경쟁에 가깝다.&lt;/p&gt;
&lt;p&gt;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amp;nbsp;&apos;무한도전&apos;을 웃으며 보지만, 실은 삶의 무한도전 상황에 지친 이웃을 위로하고 웃음주며 잠시라도 기쁨주기 위해 애써는 &apos;유재석과 그의 신도들&apos;을 보면서 맘속으로는 울때가 있다.&amp;nbsp;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웃을 일이 점점 사라지는 세태가 무섭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우리는 왜 주님을 부인하는가?&amp;nbsp; 우리 삶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삶은 어떤 것일까?&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거듭 말하지만, 단지 힘겹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은 충분히 수정 가능함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바가 아니다.&lt;/p&gt;
&lt;p&gt;정작 염려스러운 것은&amp;nbsp;비교와 경쟁 그리고 그 가운데서 정신없이 내몰리는 우리네 삶이 막다른 길에 내몰때이다.&lt;/p&gt;
&lt;p&gt;힘겨워 죽을판에&amp;nbsp;하나님의 뜻은 무슨 얼어죽을 뜻...이라 속으로 외쳐대는&amp;nbsp;삶이 위험하다.&amp;nbsp; 차라리 밖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면&amp;nbsp;낫다.&amp;nbsp; 그러나 이러한 삶의 자세는 표현도 은밀하고 때론 표현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한것이 28절의 &apos;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겁나는 세상, 현실&apos;이다.&lt;/p&gt;
&lt;p&gt;죽는다는 것, 희생 당한다는 것, 학살 당한다는 것...&amp;nbsp;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amp;nbsp;&lt;/p&gt;
&lt;p&gt;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삶이 가진 비교와 경쟁에 찌들린&amp;nbsp;삶이 가져오는 살인의&amp;nbsp;상황을 우리가 늘 겪으며 살아갈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꼭 칼로 찔러&amp;nbsp;죽여야만 죽어가는 살인의 추억이 넘실대는 핏빛&amp;nbsp;현실도 실제 상황이지만, 그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lt;strong&gt;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관련있음을 지적하신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의 삶에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amp;nbsp;목구멍을 위한 비교와 경쟁 구도는 늘 불안하고 바쁘다.&amp;nbsp;&amp;nbsp;그런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amp;nbsp; 먹고 살려면 당연한 몸부림이다.&amp;nbsp; 만일 주님께서 이런 삶 자체를 부정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리떼 가운데로 우리를 살도록 초대하셨기에 또한 그 가운데 먹고 살려면 당연히 경쟁하며 돈을 벌고 애써야 하는 삶은 어쩌면 당연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러한 분주함 가운데&amp;nbsp;&apos;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애씀과 분주함이 당연한 일상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기대와 복음의 적용 영역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애씀과 고단한 일상의 치열한 몸짓으로 인해 혹여 누군가를 죽음으로&amp;nbsp;몰고갈수있는&amp;nbsp;현실을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해져 버린 나의 모습이나&amp;nbsp;삶의 자세&apos;가&amp;nbsp;문제된다는 주님의 지적을 잊어서는 안된다.&lt;/p&gt;
&lt;p&gt;내가 잘 나가는 것이 나혼자 잘나서 그렇고 내가 즐기는데 뭔 상관이냐는 듯이 살때, 누군가는 그 경쟁에서 치이고 밀려나 비참한 심정일수있음을&amp;nbsp;의식하며 뭔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주님을&amp;nbsp;인정하며 파송받은 이땅의 제자의 삶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amp;nbsp;&amp;nbsp;32절과 33절에 &apos;누구든지&amp;nbsp;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거나 부인&apos;하는&amp;nbsp;삶의 자세는 이러한 우리의 삶의 패튼과 상관있는 말씀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초대받았다면&amp;nbsp;어쩔수없는&amp;nbsp;고달픈 현실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amp;nbsp;이들을&amp;nbsp;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amp;nbsp; 그것이 백마디 고상한 방언보다 더 의미있는 복음의 삶이다.&lt;/p&gt;
&lt;p&gt;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산상설교&amp;nbsp;8복의 선언처럼,&amp;nbsp;내 일에 너무 바쁘고 치여서&amp;nbsp;하나님의 관심과 삶의 자세로의 초대마저도 망각하고 오직 자기&amp;nbsp;목구멍을 위해서만 살아가는&amp;nbsp;제자들의 변절을 향한 경고의 나팔소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리의 현실의 삶이 복음의 삶인 이유가 한가지 더해졌다.&amp;nbsp;실패처럼 보이는 삶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순간이므로 우리네 삶의 현실이 복음이었던 것처럼, 고달프고 정신없이 바쁜 포도청같은 목구멍을 위한 내 삶의 일상을 복음의 현장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amp;nbsp;현실을 살아가는 불쌍한 나그네 인생들을 &apos;내 코가 석자임에도 불구하고&apos; 돌아보며 섬기며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음의&amp;nbsp;제대로된 응답임을&amp;nbsp;지적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우리는 왜 주님을 부인하는가?&amp;nbsp; 우리 삶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삶은 어떤 것일까?&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와 세번째 현실중에서 &apos;겹쳐진&amp;nbsp;영적 현실&apos;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치를 발한다.&lt;/p&gt;
&lt;p&gt;겹쳐진&amp;nbsp;영적 현실은 &apos;참새 이야기&apos;의 후반부에 있다.&amp;nbsp;&amp;nbsp;29~31절(...그러나 너희&amp;nbsp;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amp;nbsp;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에서 보여지는 싱거워 보이는 이야기에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참새 장사꾼들이 밖에 나가기만하면 너무나 흔하디 흔한 참새를,&amp;nbsp;별다른 고생없이 너무나 손쉬운 방법으로&amp;nbsp;그물에 빡빡할정도로 포획해 오는 현실을&amp;nbsp;보면서... 여기에 뭔 하나님의 일일이 간섭하심과 허락하심이&amp;nbsp;있단말인가...싶어 허탈한 맘...&lt;/p&gt;
&lt;p&gt;그러면서 우리들은 그렇게 잡혀오는 많은 참새들보다&amp;nbsp;더 귀하여서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는 위로의 말씀이&amp;nbsp;엄청난&amp;nbsp;힘과 격려로 다가오는가 말이다.&amp;nbsp; 허무개그처럼 &apos;오는데요!&apos;하면 할말없지만, 기실 이 말씀에 큰 위로받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멋진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것을 보면 별로 절실히 다가오는 것 같지 않다.&amp;nbsp; 나를 포함해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것과 상관해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둘러보자.&lt;/p&gt;
&lt;p&gt;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amp;nbsp;흔하게 경험하는 경쟁과 비교 그곳에서 빚어지는 갈등... 너무&amp;nbsp;흔하지&amp;nbsp;않는가? 사실 너무 흔하다.&lt;/p&gt;
&lt;p&gt;한해동안 이러한&amp;nbsp;비교와 갈등에 고민하다가 죽어간 이웃의 숫자가 몇명쯤인지 감이 잡히고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하면 사실 그렇지가 않다.&amp;nbsp;&amp;nbsp;누가 얼마나 죽어가는지 별로 관심도 없고, 마음이 그렇게까지 아프지도&amp;nbsp;않다. 그저 내앞의 문제가 더 신경쓰이고 고달플뿐이지 오지랖넓게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유명한&amp;nbsp;연예인이나 다소 지명도 있는 경제인이나&amp;nbsp;정치인이 자살했다하면 잠시 관심을 기울이며 들끊다가도 이내 곧 잊혀진다.&amp;nbsp; 다른 수많은 죽음들이 타살이 아닌 이상, 흔한 한줄자리 기사도 되지 않는 무관심속에 묻힌다.&amp;nbsp;&amp;nbsp;지난해, 2007년 대한민국 총 사망자는 244,874명이었다. 하루 평균 671명이 세상을 달리한다. 그중에서&amp;nbsp;자살자의 수는 12,174명이었다.&amp;nbsp;하루 평균 33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올해 통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진것과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로 더 많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너무나 흔하고 종종 경험하는&amp;nbsp;홍수같은 일들이 매번 반복되면서 생기는 중요한 영적 현상이&amp;nbsp;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amp;nbsp;삶을 통한 주님을 인정하고 불인정하는 것과 관련이있는 중요한 태도로서의 &apos;무관심, 무감각&apos;임을 보았다.&amp;nbsp; 사실상, 드물게 발생하는&amp;nbsp;사건 앞에 무관심 할수있는&amp;nbsp;강심장을&amp;nbsp;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amp;nbsp;땅의 영적 현실로서, 너무나 흔하고 자주 발생하게 되면 그것이 무덤덤하게 그리고 제대로된 가치를&amp;nbsp;망각한채 그저 막 대하게&amp;nbsp;되는 위험이&amp;nbsp;바로 이것이다.&amp;nbsp; 내 삶이 주님의 복음이 되는 삶에 있어 치명적이라 할수있는 영적 현실임을 앞서 확인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므로&amp;nbsp;&lt;strong&gt;이러한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amp;nbsp;현실&amp;nbsp;속에서 분명한 삶의 열매로 우리를 판단하실 주님을 잊지 않는 것이&amp;nbsp;그분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다&lt;/strong&gt;.&amp;nbsp; 즉,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 무관심과 이기심으로&amp;nbsp;무장되는 육의 옷을 벗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성령으로 옷입기를 잊지 않는&amp;nbsp;믿음의 자세가 &apos;겹쳐진 영적 현실&apos;을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경쟁에서 밀려났다해서 무가치하고 끝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며 가치있는 삶임을 확인하며 서로 더불어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며&amp;nbsp;나누며 살아가는 삶... &lt;strong&gt;내 삶의 열매는&amp;nbsp;이땅의 비교와 경쟁에서 맺어지는&amp;nbsp;것이 아니라,&amp;nbsp;비교와 경쟁의 결과에 상관없이&amp;nbsp;내가 자리한 곳에서 서로&amp;nbsp;불쌍히 여기며 돕고 섬기며 위로하는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삶임을 고백하며 용기를 잃지 않는것, 낙심하지 않는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죽음으로 내몰리는 &apos;내&amp;nbsp;뜻대로 그리고 기도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apos;에서&amp;nbsp;그래도 나를 가치있어 하시고 나를&amp;nbsp;향한 기대와&amp;nbsp;뜻이 있음을&amp;nbsp;알아,&amp;nbsp;예수님께서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 - 낙심하지 않고 살아있는것,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돕고 섬기는&amp;nbsp;것, 세상의 비교와 경쟁에 의한 열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의 소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복음의 삶임에 주목하기를 원하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내가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 기준에 의해 움직이며 살아가는 &apos;하늘에 속한 사람&apos;이라는 분명한 정체성, 부름의 소명을 잃지&amp;nbsp;않고 견디며 살것을 원하시는 복음의 삶이다.&amp;nbsp; 예수님께서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살다 가셨기 때문이다.&amp;nbsp;비록 세상 사람들 보기엔 형편없는 실패처럼, 남은 것 하나없는 비참한 삶처럼 보인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amp;nbsp; 원하시는 의의&amp;nbsp;열매를 위한 거룩한 복음의 삶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고백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와 세번째의 겹쳐진 현실을 요약한다면...&lt;/p&gt;
&lt;p&gt;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두번째 현실이 이와같은 극심한 낙심과 부정적인 감정이 넘실댈수있는 곳임과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림으로 주님을 부인해&amp;nbsp;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닥칠수있음을 경고하심이다.&amp;nbsp;&lt;/p&gt;
&lt;p&gt;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 왜곡하며 핍박함으로 우리의 현실이 마냥 고달프기만한 의미없는 세상같이 몰고가는 현실 속에서 정작 이러한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현실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연합하시어 복음의 현장되게 하시는 주님의 열심이 녹아나는 복음의 현장임을 들려주셨다. 또한 이어서 그러한 고달픈 경쟁과 이기심 속에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복음의 현실과 현장이 더이상 의미없어 보이는 영적 무감각에 빠져든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도 이원론적 삶(선데이크리스챤 같은)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주님께서는 몸과 영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몸을 죽이는&amp;nbsp;두려운 현실의 삶이 복음 자체이며 복음의 현장임을 다시금&amp;nbsp;강조하신다.&amp;nbsp; 잊어버릴만한 충분한 이유와 연약함이&amp;nbsp;있지만, 다시금 그 흔하디 흔한 참새 한마리(덤으로 얹어줬을수도 있는 그 참새 한마리)조차도 하나님의&amp;nbsp;뜻을 이루는 미물일찐데, 하물려 머리털까지 다 센바된 너희들일까보냐...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리떼 가운데로 파송받은 어린양과 같은 제자들과 우리들의 현실은&amp;nbsp;이처럼 만만치 않은 복음의 현장이다.&lt;/p&gt;
&lt;p&gt;이미 이루셨지만 아직 남겨두신 주님의 뜻과 소명을 향한 부르심은 세상끝날까지 여전히 유효함을&amp;nbsp;잊어서는 안될것이다.&lt;/p&gt;
&lt;p&gt;이 땅에&amp;nbsp;살아가지만 하늘에 속한&amp;nbsp;&amp;nbsp;자녀임을 다시금 헤아리며 집을 나서고 교회를 나서기를... 소망한다. 힘겨울 것이 뻔한 일상이 충분히 예상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비집고 들어오는 삶의 현장임을 애써 고백하며 자살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또 하루를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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